주일설교 - 겸손의 왕, 보석같은 백성
- 박정배
- 10월 25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10월 25일
도입: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스가랴서의 두 장을 통해 우리의 예배와 삶의 중심을 점검해 보려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BC 520년경, 성전 재건이 진행되던 때였습니다.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있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온 지도 18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성전을 재건하려 했지만 2년만에 멈춰졌습니다. 이제 집도 짓고 직업도 가지고 그런대로 정착했습니다. 멈췄던 성전 재건도 막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으로 교회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영덕동에 교회가 세워지고 다음세대를 위한 학교도 세워지고 가정의 문제도, 개인적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많은 사역들도 이루어지고 있고 나도 이제 살만해졌습니다. 이제 다 잘 되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꿈꾸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누군가는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꿈꾸며 강릉에서의 새로운 걸음도 기대하고 우리의 삶이 교회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비록 16년간 하나님의 집은 멈추었지만..
바로 그때, 벧엘에서 온 사람들이 제사장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70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다섯째 달(티샤 베아브)에 금식하며 애통했는데, 이제 성전이 재건되었으니 이 금식을 계속해야 합니까?"
아마도 그들은 이런 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수고했습니다. 이제 슬픔의 계절이 끝났으니 금식도 끝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스가랴 7장 5-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것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0년 동안 행해진 종교 행위의 진심을 하나님은 의심하십니다. "그것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하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십니다.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회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만족이나 자기 의(義)를 위한 형식적인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한 순종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놓치고 자기 중심의 삶으로 바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불순종의 뿌리, 자기중심의 교만입니다.
본론 1: 형식적인 불순종의 뿌리 - 중심의 교만 (스가랴 7장)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금식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중심이었습니다.
1) 겉모습과 중심의 괴리 (7:5-6)
그들은 외적으로는 슬픔과 금식의 의식을 행했지만, 그들의 일상과 삶의 중심은 오직 자신만을 향했습니다. 금식할 때는 '나의 경건함'을 자랑하고, 금식하지 않을 때는 '나의 배와 재산'을 채웠습니다. 금식도, 먹고 마심도 모두 '나를 위하여' 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경건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고(마가복음 12:40), 정의와 긍휼은 버려두었습니다(마태복음 23:23).
경건의 형식으로 자신을 의롭다 하면서도, 일상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가 중심이 되는 삶,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는 이중적 삶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삶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중심 (7:9-10)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형식이 아니라, 중심의 변화에서 나오는 삶의 열매였습니다.
스가랴 7장 9-10절을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분의 형상인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공의가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특히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안타까움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나를 위한 삶에서 이웃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위한 헌신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7장 11-12절을 보면,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이키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금식은 하지만, 예배참석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주님의 관심인 영혼 구원에는 다이아몬드 같은 굳은 마음으로 듣기를 싫어하고 등을 돌리며 귀를 막고 십자가의 길을 거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 아침에 은혜롭게 예배드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열심히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섬김과 사랑으로 나의 시간과 능력을 사용합니까? 오히려 나를 섬기라고 주장하며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물 없는 구덩이에 빠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현실을 주님의 눈으로 보면 절망적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나입니다. 이것이 나를 위한 삶의 결과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인지, 오늘 우리의 중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본론 2: 중심을 바꾸는 왕의 통치 - 겸손과 순종 (스가랴 9장)
금식조차 자기만족으로 돌려버리는 인간의 교만한 중심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중심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절망적인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한 분의 왕을 보내주십니다.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골짜기 사이에 있는 화석류나무. 그것은 교회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너무나 작지만 그곳에 계신 하나님의 군대. 이것이 소망입니다. 여전히 교회는 세상에서 너무나 작아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을 들어서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라 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입니다.
1) 겸손으로 통치하시는 왕 (9:9)
우리의 교만과 탐욕과는 정반대로 오신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메시아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마태복음 21장). 예수님은 힘과 권력으로 우리의 중심을 강제로 점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황제들이 타던 백마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인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우리의 교만을 완전한 겸손으로 이기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이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겸손의 왕은 단지 개인의 평화만 가져오신 것이 아닙니다. 스가랴 9장 10절을 보면,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이 왕은 전쟁 병기를 끊으시고 원수 된 것을 허물고 평화를 이루십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이 증거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만한 우리는 힘으로 남을 정복하려 하지만, 겸손의 왕은 사랑으로 원수까지 품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위하여' 행했던 우리의 모든 금식과 행위를 심판하시고, 진정한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새 생명, 곧 성령을 주십니다.
2) 언약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 (9:11-12)
이 겸손의 왕께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의 갇힌 상태를 해방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11,12절을 읽겠습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우리는 탐욕과 교만으로 죄의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금식하고, 아무리 종교 행위를 해도,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구덩이는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언약의 피만이 우리를 그 구덩이에서 놓아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복음 26:28).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백성은 이제 더 이상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9장 12절이 말합니다. "소망이 있는 갇힌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 선언하노니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의 정신을 중심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스가랴 9장 13-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그리고 세상을 이기실 것입니다, 그분이 왕이 되셔서 하나님 없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세상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자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두 여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로 비유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이 교회입니다. 두 감람나무 사이에 기름 그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는 교회의 그림입니다. 그 교회는 촛대와 같이 세상에 유일한 빛 되시는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계시록에는 두 여인이 나옵니다. 해를 입은 여인과 음녀, 이것은 교회와 사탄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비록 사단의 권세로 인해 핍박과 환란을 당하겠지만 결국에는 교회가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어디에 속할 것인가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결론: 왕관의 보석으로 빛나는 삶 (9:16-17)
우리가 겸손의 왕을 중심으로 모실 때,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스가랴 9장 16-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이 어찌 그리 큰지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한지 곡식은 청년을 강건하게 하겠고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로다"
탐욕과 교만의 중심을 가지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던 7장의 이스라엘은, 이제 겸손의 왕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왕관의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로 회복되었습니다.
보석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습니다. 빛을 반사할 때 빛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의 빛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반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17절은 묻습니다. "그의 형통함이 어찌 그리 큰지,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한지!" 이것은 물질적 번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의 왕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의 영적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이 힘과 성공으로 빛날 때, 우리는 겸손과 긍휼로 빛나는 하나님 나라의 보석이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적용: 우리는 어떻게 빛을 반사할 것인가?
우리의 예배와 헌신이 진짜인지 점검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스가랴 7장 10절의 질문입니다.
스가랴 7장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늘날 이들은 누구입니까? 직장과 학교, 가정에서 죄로 인해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우리의 삶의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갈라디아서 2장 6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러나 겸손의 왕 예수님이 우리 중심을 다스리실 때, 우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정직과 정의)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친절과 자비)
약한 자를 압제하지 않고 오히려 세우며 (돌봄과 보호)
서로 해하려고 도모하지 않는 (평화와 화해)
이런 삶을 살게 됩니다.
외적인 형식, 즉 금식이나 예배 출석만이 아니라, 왕 되신 예수님을 따라 내 중심을 온전히 바꾸어 참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