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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역대상 25:1-31

7시간 전
7분 분량

노래하는 선지자

본문: 역대상 25장 1절 ~ 31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제비 뽑는 제사장들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론의 자손을 엘르아살 계열과 이다말 계열로 나누어 스물네 반열을 세우고, 큰 자와 작은 자를 구별하지 않고 제비를 뽑아 섬김의 순서를 정했습니다. 섬김의 차례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오늘 25장을 열면 같은 숫자 스물넷이 다시 나옵니다. 어제 본 그 제비도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비를 뽑는 손에는 칼도 제물도 아니라 수금과 비파와 제금이 들려 있습니다.

역대기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람들을 차례로 세웁니다. 제사장 다음이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바로 다음 자리에 찬양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스물네 반열은 제사장의 스물네 반열과 나란히 섭니다. 찬양은 예배의 장식이 아니라, 제사장의 섬김에 버금가는 성전 봉사였습니다.



1. 수금을 잡아 예언하는 사람들 (25:1~3)

"1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 2 아삽의 아들들은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지휘 아래 왕의 명령을 따라 신령한 노래를 하며 3 여두둔에게 이르러서는 그의 아들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시므이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의 아버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대상 25:1~3)


"구별하여"는 바달입니다. 레위인을 구별하고, 아론의 자손을 제사장으로 구별할 때 쓰던 바로 그 동사입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무게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를 하게"가 원어로 하니베임,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들이 하는 일을 노래라 부르지 않고 예언이라 부릅니다.

선지자 : 말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찬양대 : 노래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찬양대가 악기를 잡고 부르는 노래는 흥을 돋우는 여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이름이 시편 표제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찬양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입술의 노래를 넘어, 하나님 말씀을 노래로 선포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오늘 생명의 삶 본문 해설의 글입니다.



실제로 아삽의 자손 야하시엘은 여호사밧 시대에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어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에서 왕은 노래하는 자들을 군대 앞에 세웠습니다.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대하 20:21~22)

3절의 "감사하며 찬양하며"를 직역하면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을 두고 예언하며"입니다. 감사(호도트)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찬양(할렐)은 그 이름을 소리 높여 기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품는 것보다 밖으로 드러내어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감사와 찬송을 들고 그분 앞에 나아가라고 부릅니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

찬양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노래이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찬양을 듣는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찬양 시간은 설교를 기다리며 마음을 데우는 준비 순서가 아닙니다. 이미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가 따라 부르는 그 고백이 옆에 선 지체에게는 권면이 되고, 지친 영혼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찬양대와 찬양팀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화려한 소리보다, 자기가 부르는 말씀을 먼저 믿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하는 사람들이 "지휘 아래" 있습니다. 직역하면 '아삽의 손 아래, 왕의 손 아래'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 아래, 아버지는 왕의 손 아래. 1절부터 3절까지 "예언하다"가 세 번, "지휘 아래"가 세 번 나옵니다.

"자유는 틀 안에 있다!"

성령의 감동과 사람의 질서는 서로 맞서지 않습니다. 참된 영적 자유는 무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기꺼이 자기를 맞추는 데 있습니다.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 14:32~33)



2. 뿔을 높이시는 하나님 (25:4~7)

"4 헤만에게 이르러는 그의 아들들 북기야와 맛다냐와 웃시엘과 스브엘과 여리못과 하나냐와 하나니와 엘리아다와 깃달디와 로맘디에셀과 요스브가사와 말로디와 호딜과 마하시옷이라 5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들이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6 이들이 다 그들의 아버지의 지휘 아래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의 전에서 노래하여 하나님의 전을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지휘 아래 있었으니 7 그들과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 (대상 25:4~7)


아삽은 한 절, 여두둔도 한 절, 헤만은 세 절입니다. 헤만만 "왕의 선견자"라 불립니다. 선견자는 선지자입니다.

"나팔을 부는 자들"의 원어는 레하림 카렌입니다. 카렌은 본래 '뿔'입니다. 직역하면 '뿔을 높이려고'. 뿔을 높인다는 것은 힘과 위엄을 더하여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신 것이 곧 그의 뿔을 높이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찬송하는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헤만의 아들들 이름에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냐부터 마하시옷까지 아홉 이름은 보통의 이름 같지 않습니다. 깃달디는 '내가 크게 하였다', 로맘디는 '내가 높였다'는 말입니다. 이 이름들을 이어 읽으면 시편 한 토막이 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나의 도움이신 주를 크게 하고 높였습니다. 내가 곤경 중에 앉아 있을 때 말했습니다. 환상을 풍성히 주소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노래하는 집안이 그 기도를 아들들의 이름으로 지니고 살았습니다.

헤만의 이름이 붙은 시가 시편 88편입니다. 시편에서 가장 어두운 탄식시입니다. 그 시는 "흑암"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시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시 88:1)

흑암 속에서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찬송하는 사람은 곤경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곤경 중에도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5)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진 한밤중이었습니다. 그 찬송을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곤경 중의 찬송은 그 자체로 설교가 됩니다. 형통할 때 부르는 노래보다, 무너진 자리에서 부르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 더 멀리 들립니다. 노래하는 선지자는 그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한 찬양 사역자의 이야기입니다. 첫 앨범을 내고 활발히 사역하던 중, 남편이 담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투병 과정을 '영광 프로젝트'라 부르며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을 먼저 보냈습니다. "왜 하필 저인가요?" 서운함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아들과 딸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땅에서 잘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치부했던 제 믿음의 민낯을 본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계속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것임을 압니다. 고난 중에 피어나는 꽃처럼요."



7절의 288명은 "배워 익숙한 자"입니다. 배워서(라마드) 몸에 익힌 사람들이고, 익힌 것을 알아보는 눈(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재능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부르는지 알고 불렀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찬송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다고 깊은 찬송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그분의 성품을 깨닫고, 삶에서 그분의 신실하심을 경험할 때 노래가 깊어집니다.

6절 "하나님의 전을 섬겼으며"의 섬김은 아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전에서 드리는 바로 그 봉사입니다. 손에 든 것이 제물이 아니라 수금이었을 뿐, 그들의 노래는 제사와 나란히 놓인 예배 그 자체였습니다.

"살아 있는 예배에는 하나님을 향한 즐거운 소리가 있습니다."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3.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25:8~31)

"8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다 같이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9 첫째로 제비 뽑힌 자는 아삽의 아들 중 요셉이요 둘째는 그달리야이니 그와 그의 형제들과 아들들 십이 명이요 10 셋째는 삭굴이니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십이 명이요 11 넷째는 이스리이니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십이 명이요" (대상 25:8~11)

"30 스물셋째는 마하시옷이니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십이 명이요 31 스물넷째는 로맘디에셀이니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십이 명이었더라" (대상 25:30~31)


어제 본 그 제비입니다. 나이와 경력이 특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스승이나 제자나."

"제자"는 탈미드, 구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훗날 스승에게 배우는 '제자'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낱말이 됩니다. 찬양대 안에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를 길러 찬양을 잇게 하고, 제자는 스승에게 배워 찬양을 다음 세대로 잇습니다. 그런데 섬김의 자리를 정할 때는 스승도 제자도 똑같이 제비 앞에 섰습니다.

첫 제비는 아삽의 장자 삭굴이 아니라 둘째 요셉에게 갔습니다. 가장 작은 가문이던 아삽의 아들 넷은 네 반열을 받았고, 헤만의 열네 아들은 열네 반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절부터 31절까지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십이 명"이 스물세 번 반복됩니다.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스물네 반열 하나하나에 똑같이 한 줄씩을 줍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스물넷째 반열도 첫째 반열과 똑같이 귀합니다.

"예배자의 자리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눈에 띄는 자리든 드러나지 않는 자리든,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라면 그곳이 가장 귀한 사역의 자리입니다."

우리 교회의 봉사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앞에 서는 자리가 있고 뒤에서 의자를 정리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래 섬긴 사람이 있고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오래 섬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을 길러 주고, 배우는 사람은 겸손히 배우며, 둘 다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큰 자와 작은 자가 똑같이 제비 앞에 선다는 것은 큰 겸손의 증언입니다.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 12:18, 22)


이제 그리스도께로 갑니다. 찬양대는 "왕의 지휘 아래"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왕은 지휘만 하지 않으십니다. 친히 노래하십니다. 십자가로 가시는 밤에도 노래하셨습니다.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 26:30)

헤만의 집이 곤경 중에 부르던 노래를, 예수님은 겟세마네와 골고다를 앞두고 부르셨습니다. 그 노래 덕분에 큰 자도 작은 자도, 스승도 제자도 오늘 형제라 불리며 그분 곁에서 노래합니다.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3)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다윗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을 구별하여 신령한 노래, 곧 예언을 하게 했고, 하나님은 찬송하는 헤만의 뿔을 높이셨고, 288명은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이 제비로 자리를 받았습니다.

선포, 곤경 중의 노래, 그리고 받은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찬양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드러내어 인정하는 선포입니다.

둘째, 곤경 중에도 노래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우리의 첫 문장이 될 때,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가장 풍성한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셋째, 내 자리는 받은 자리입니다. 첫째 반열도 스물넷째 반열도 똑같이 한 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노래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찬양을 통해 열방이 그분을 보게 할 수 있다." - 마틴 로이드 존스



오늘의 찬양

새 26장 〈구세주를 아는 이들〉 — 오늘의 찬송.

지면에 함께 실린 경배와 찬양 가사의 "비파와 수금으로 … 온 맘 다해 주를 높이세"가 1절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와 겹칩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찬양의 제사 드리며〉

6절 "하나님의 전을 섬겼으며"의 섬김은 제사장의 봉사와 같은 말입니다. 노래가 곧 제사였던 찬양대처럼, 찬양을 제사로 드리는 고백입니다.



새 21장 〈다 찬양하여라〉

스물네 반열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십이 명"으로 불렸듯, 온 회중이 함께 전능하신 창조주를 찬양합니다. 파송 찬송으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성경은 찬양대의 노래를 "예언"이라 불렀습니다.

나는 찬송할 때 음악과 감정에만 머무르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드러내어 인정하며 선포하는가?


헤만의 집은 곤경 중에 말씀을 구하는 노래를 이름처럼 지니고 살았습니다.

지금 내가 지나는 곤경의 자리에서 나의 첫 문장은 원망입니까,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은 나의 하나님"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를 "받은 자리"로 여기고 있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의 찬양이 분위기가 아니라 말씀이 되게 하소서.

찬양대와 찬양팀이 노래하는 선지자로 서게 하시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익혀 찬송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소서.

큰 자나 작은 자나 맡은 자리를 높고 낮음 없이 귀히 여기게 하소서.



삶이 예배로 드려지길 바라면서도 입술과 마음에 넘쳐야 할 찬양의 강이 메말라 있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하시고, 날마다 찬양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오게 하소서.

하나님이 세워 주신 예배자의 자리를 귀히 여기며 기쁘게 성실히 감당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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