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역대상 21:9-17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본문: 역대상 21장 9절 ~ 17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내 것이 아닌 것을 세는 다윗을 보았습니다. 승리의 정점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힘의 숫자로 세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자 그는 마침내 고백했습니다.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그런데 그 고백 다음 절에 용서의 선언이 오지 않습니다. 선견자 갓이 옵니다. 그의 손에는 세 가지 재앙이 들려 있습니다.
회개는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죄의 결과까지 자동으로 지워 주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심판의 한복판에서,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긍휼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인구조사 사건의 전환점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사탄의 충동을 따라 첫 번째 선택을 했습니다. 오늘 13절에서 그는 두 번째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칼을 든 천사가 멈춰 선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내일 본문에서 성전 터가 됩니다.
1.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21:9~12)
"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내어놓으리니 그중에서 하나를 네가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11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12 혹 삼년 기근이든지 혹 네가 석 달을 적군에게 패하여 적군의 칼에 쫓길 일이든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전염병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이든지라고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지를 결정하소서 하니" (대상 21:9~12)
"선견자"는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앞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보던 왕에게 보는 자를 보내셨습니다.
다윗은 눈에 보이는 군사를 보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은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심판을 알리러 온 선견자가, 실은 다윗을 회개와 자비의 길로 이끄는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갓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굴에 숨어 있던 때부터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가장 오래된 친구의 입으로 가장 아픈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냉정합니다. 회개한 다윗에게도 징계가 옵니다. 고백이 심판의 실재를 줄이지 않습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거룩하심과 공의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십니다. 세 가지 선택지는 심판의 종류였을 뿐, 심판을 면제받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버림이 아닙니다.
"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 3:11~12)
세 가지 심판 중에 골라야 합니다.
삼 년 : 기근
석 달 : 적군의 칼
사흘 : 여호와의 칼
기간은 짧아지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말은 점점 길어집니다. 사무엘하는 셋째를 그냥 '전염병'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역대기는 거기에 '여호와의 칼'과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하는 여호와의 천사'를 덧붙였습니다. 셋째 재앙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집행하시는 심판입니다. 가장 짧고, 가장 무겁습니다.
"멸할 일"이 마쉬히트, '파괴하는 자'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무서운 말 뒤에, 역설적이게도 다윗이 붙든 소망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의 칼은 공의를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칼은 온 땅을 칠 만큼 무섭다 해도, 여호와의 성품인 긍휼과 자비를 끊어 버릴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지를 결정하소서." 이제 공이 다윗에게 넘어왔습니다. 1절에서 "계수하라"를 택했던 그 입이, 다시 택해야 합니다.
2.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21:13)
"1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대상 21:13)
내가 빠지고
그의 손에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사람의 손에
내가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한가운데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가 서 있습니다. 다윗이 의지한 것은 징계의 가벼움도, 고통의 짧음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긍휼이었습니다. "긍휼"은 '태'(胎)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향해 품는, 창자가 뒤틀리도록 애틋한 사랑입니다. 자식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어머니의 뜨거운 자비입니다.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죄를 지은 사람이 도리어 하나님의 손에 뛰어듭니다. 하나님의 손이 두렵지만, 그 손을 떠나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은 1절과 짝을 이룹니다.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키우는 쪽을 택했습니다. 1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소망으로 물러섭니다. 그 소망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하기에, 영원한 소망입니다.
첫 번째 선택은 숫자였고, 두 번째 선택은 긍휼이었습니다.
"다윗은 가장 끔찍해 보이는 형벌을 택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는 것을!"
어제 다윗은 "칼을 뺄 만한 자", 곧 사람의 손을 셌습니다. 오늘 그는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구합니다. 그토록 의지하려던 손이, 이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손이 되었습니다.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3~14)
물론 하나님의 손은 무섭습니다.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그런데 그 무서운 손이 가장 안전한 손입니다. 공의의 손이 곧 긍휼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2)
한절 묵상의 글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아픔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매를 드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3. 족하다, 그리고 이 양 떼는 (21:14~17)
"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지라" (대상 21:14~15)
칠만 명입니다. 다윗이 헤아렸던 백십만이라는 숫자와 뼈아프게 겹칩니다. 세어서 손안에 쥐려던 그 백성이, 순식간에 줄어들었습니다.
14절의 "죽은 자"는 원문에서 '엎드러졌다'(나팔)입니다. 13절에서 다윗이 "빠지기를" 원한다고 할 때 쓴 바로 그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구했는데, 백성이 "엎드러집니다." 한 사람의 실패가 공동체 전체의 엎드러짐이 되었습니다. 지도자의 죄는 결코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칼은 예루살렘 앞에서 멈춥니다.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나님이 "뉘우치사"라는 말은 하나님이 실수하고 후회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간구하는 백성을 향해, 언약의 성품을 따라 긍휼로 심판을 돌이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덕처럼 보이는 그것이, 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 그분의 본성입니다.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 2:13)
"족하다." 그 한계선을 정한 것은 우리 회개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크기입니다. 13절에서 긍휼을 붙든 다윗의 고백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대상 21:16)
"눈을 들어 보매." 땅에 있는 군사의 수를 내려다보던 다윗의 눈이, 이제 하늘을 향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하늘의 실재를 마침내 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칼을 빼어 든 천사입니다. 천사의 칼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오지만, 이스라엘을 향해 겨누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숫자를 내려다보던 눈이, 칼을 든 천사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다윗이 한 일은 하나였습니다. 굵은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땅을 볼 때 높아졌던 사람이, 하늘을 보자 낮아졌습니다.
"17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대상 21:17)
"곧 나이니이다" '바로 접니다!'라는 강조입니다. 사탄 탓도, 요압 탓도 하지 않습니다. "범죄한 자, 악을 행한 자, 그것은 바로 저입니다."
어제는 "칼을 뺄 만한 자"였던 백성이, 오늘은 "이 양 떼"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백성을 다시 병력이 아니라, 자기가 책임져야 할 양 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로서 기도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결과를 자기가 받겠다고 나서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고, 백성을 위한 중보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니엘이 섰던 그 자리에 다윗이 섭니다.
고대 그리스에 잘레우코스라는 입법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한 사람의 두 눈을 빼도록 법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그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아들의 한쪽 눈과 자기의 한쪽 눈을 내놓았습니다. 법이 요구한 값은 치러졌고,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도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값을 치를 수 없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치소서"라는 그의 기도는, 장차 오실 완전한 중보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되면 주신 증거니라" (딤전 2:5~6)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나를 치소서"라고 기도한 다윗은 맞을 수 없었고, 기도하지 않아도 되었던 분이 맞으셨습니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4~25)
하나님은 예루살렘 앞에서 "족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 년 뒤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습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0)
"족하다"는 칼을 멈추게 했고, "다 이루었다"는 칼을 영원히 거두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선견자가 세 가지 재앙을 내밀었고, 다윗은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택했고, 하나님은 "족하다" 하셨고, 다윗은 "나를 치소서" 하며 엎드렸습니다.
징계, 긍휼, 그리고 중보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막대한 만큼, 주님이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은 상상을 초월한다." - 팀 켈러
미국 휴스턴에서 공부하던 한 여대생이 친구 세 명과 밤을 새워 가며 중간고사를 치렀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서로를 격려하려고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식사 전에 지혜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계산서를 요청했는데, 거기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트레비스와 킴벌리." 옆 테이블의 부부가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음식 값과 팁까지 모두 내고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내지 않고 당당하게 식당을 나왔습니다.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값이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오늘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모든 어두운 과거를 치료하고, 새 출발을 하게 합니다. … 그분은 어떤 실패의 자리에서도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회개는 결과를 지우는 지우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징계는 오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매입니다.
둘째, 징계 앞에서 사람의 손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빠지십시오. 그 손은 가장 무섭고, 그래서 가장 자비롭습니다.
셋째, "나를 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는 그리스도에게서 응답되었습니다.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값을, 그분이 이미 치르셨습니다.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2~23)
오늘의 찬송이 새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입니다. 징계의 멍에 아래 있는 우리가 갈 곳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주님의 손입니다. 이 새벽, 아침마다 새로운 그 긍휼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 오늘의 찬송.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 13절, 징계 앞에서 사람의 손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으로 나아간 다윗의 선택을 우리의 고백으로 부릅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주 품에〉(루벤 모건)
13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두려운 심판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품 아래 숨는 고백입니다. 결단의 자리에서.
새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17절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다윗이 치를 수 없었던 그 값을 대신 지신 왕의 고난을 부릅니다. 파송 찬송으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다윗은 회개한 뒤에도 징계를 받았습니다.
나는 회개하면 결과까지 다 사라져야 한다고 여기며, 지금의 어려움을 억울해하거나 피하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어려움을 아버지의 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다윗은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며 "나를 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아파하는 가족이나 공동체가 있다면, 오늘 그들을 위해 어떤 중보의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실패와 징계의 자리에서 사람의 손을 찾아 변명하거나 숨지 않고, 긍휼이 심히 크신 여호와의 손에 엎드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양 떼를 위해 중보하는 목자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하소서.
두려운 심판의 순간에도 하나님 손에 삶을 맡기고, 죄를 철저히 회개하며 돌이키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의 공의로우심 앞에 납작 엎드릴 때,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다시 살게 하소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