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역대상 21:1-8
내 것이 아닌 것을 세다
본문: 역대상 21장 1절 ~ 8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랍바의 왕관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요압이 랍바를 함락했습니다. 가드의 거인들도 쓰러졌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다윗의 손과 그 신하들의 손에 다 죽었더라".
사무엘하가 그 사이에 기록한 밧세바 사건을 역대기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기는 다윗의 죄 중 이것을 빼놓지 않습니다. 인구조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다윗의 회개와 제단을 거쳐, 성전 터가 정해지는 자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18장부터 20장까지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들을 차례로 굴복시키셨습니다. 언약을 받았고, 사방에서 이겼습니다. 다윗 인생의 정점입니다. 바로 그 정점 뒤에 이 장이 옵니다. 생명의 삶 본문 해설의 첫 문장이 오늘의 열쇠입니다.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다윗은 점차 교만해집니다."
가장 위험한 때는 가장 잘될 때입니다.
1. 사탄이 일어나 (21:1~2)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대상 21:1~2)
예고도 서론도 없이 사탄이 등장합니다. "충동하여", '부추기다', '꾀어 나서게 하다'라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없던 생각을 슬며시 심어 넣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밀어붙이는 은밀한 부추김입니다. 같은 사건을 사무엘하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삼하 24:1)
사무엘하는 이 일을 하나님의 주권에서 바라보았고, 역대기는 실제로 다윗을 부추긴 대적을 지목했습니다. 욥기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사탄의 행동이 겹쳐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활동은 제한되어 있고, 하나님의 개입 앞에서 언제나 무력합니다. 그가 일으키는 악은 하나님께 허락되고, 또 제한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충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3~15)
사탄은 다윗이 약할 때 오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헤맬 때가 아니라, 모든 대적이 무너지고 왕관이 머리에 씌워진 뒤에 왔습니다.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2절의 명령은 단호합니다. "가라! 계수하라!" 접속사 없이 명령이 이어집니다.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온 땅입니다. 문제는 세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마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을 굳이 세어 숫자로 가두려 할 때, 그 헤아림은 신뢰의 자리를 넘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자기 소유의 숫자로 바꾸려는 마음이, 이 담담해 보이는 명령 한 줄에 숨어 있습니다.
"그 수효를 알게 하라." 다윗이 알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숫자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윗의 자손을 봅니다. 그분도 사탄 앞에 서셨습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네가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8~10)
다윗은 자기 나라를 세려 했고, 예수님은 천하만국을 거절하셨습니다.
시험은 늘 이렇게 옵니다. "이것이 네 것이다. 세어 보아라. 확인해 보아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나라들을 세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실 나라를, 사탄의 손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먼저 이기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21:3~6)
"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대상 21:3~4)
요압이 말립니다. 특별히 예민하지도 않은 요압도 놀랍니다. 그리고 "어찌하여"를 두 번 반복합니다. 시편의 탄식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범죄하게"는 '죄책', '허물'이라는 말입니다.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행위입니다. "이 일"이 곧 "죄책"이라고 문장 구조가 말합니다. 이 경고는 사무엘하에는 없고 역대기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치시기 전에, 먼저 요압의 입으로 말리셨습니다.
인구조사 자체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도, 성소의 세금을 위해서도, 레위인을 세울 때도 백성을 셌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였습니까. 다윗은 백성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잊었습니다. 다른 계수는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향했지만, 이번 계수는 세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증언하는 셈이 아니라, 자기 힘을 확인하는 셈이었습니다.
"5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6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대상 21:5~6)
"칼을 뺄 만한 자"를 직역하면 '칼집에서 칼을 빼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는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안전을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의 수에 맡기려 한 것입니다. 많은 숫자에 안심하는 순간, 나라를 지키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잊게 됩니다.
그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이렇게 외쳤던 사람입니다.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
소년 다윗은 칼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했고, 왕 다윗은 칼이 많아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17)
6절의 "마땅치 않게 여겨"는 원문에서 훨씬 강한 말입니다. '가증히 여기다', '역겨워하다'입니다. 하나님이 우상 숭배를 역겨워하신다고 할 때 쓰는 말과 같은 뿌리입니다. 늘 왕의 뜻을 앞장서 이루던 요압이 손사래를 친 명령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레위와 베냐민을 세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은 예루살렘과, 레위는 성전과 연결된 지파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틈을 통해, 훗날 예루살렘이 재앙에서 보존되고 성전 터로 정해지는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요압의 첫마디를 다시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더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데, 왜 세십니까?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다윗은 백성이 자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 20:28)
통장 잔고, 사역의 규모, 성과, 사람의 수, 세상의 평판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의 근거로 삼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오늘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언제일까요? … 오히려 위기를 넘긴 후 안정기에 접어든 때가 더 큰 위기입니다. 멋진 예배당과 시스템을 갖추고, 교역자와 성도가 많아졌을 때, 우리는 쉽사리 그것을 자랑하고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식고, 우리가 더는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지 않는 그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입니다."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
3.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21:7~8)
"7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대상 21:7~8)
"악하게 여기사"는 '하나님의 눈에 악하였다'는 말입니다. 요압은 그 명령을 역겨워했고, 하나님은 그 일을 악하게 보셨습니다. 신하의 혐오와 하나님의 진노가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군사의 수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한 것, 그것은 신뢰의 배반이었습니다.
"치시매"는 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을 심판하실 때 쓰는 말입니다. 19장과 20장에서 다윗을 통해 암몬과 아람과 블레셋을 치신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어제까지 대적을 치시던 손이 오늘 이스라엘을 칩니다. 잔인한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랑하려던 바로 그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조사 후에 스스로 마음에 자책합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그 자리에 "이스라엘을 치시매"를 둡니다. 하나님의 매가 먼저 오고, 그 매가 다윗을 돌이킵니다.
하나님의 매는 다윗을 버리시는 손이 아니라, 다윗을 돌이키시는 손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가 니스칼티입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다"(하타티)라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미련하게 행했다"고까지 고백했습니다. 성경에서 미련한 자는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을 삶의 셈법에서 빠뜨리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셈법에서 빠진 한 분, 그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백십만과 사십칠만을 더하면 백오십칠만입니다. 그 큰 숫자 안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하면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으로도, 소년의 물맷돌 하나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정직함, 그것이 무너진 자가 다시 일어서는 첫걸음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이 전환점이 된 사건이 둘 있습니다. 밧세바 사건과 오늘의 사건입니다.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삼하 12:13)
이 고백에서 다윗은 세 가지를 드러냅니다.
죄의 주체 : 바로 나입니다
죄의 해결 : 하나님의 용서에 달려 있습니다
죄의 정체 :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어리석음입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는 '내 죄악을 옮겨 치워 주소서'라는 간구입니다. 회개로 죄의 결과가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고백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쌓을 제단으로 이어지고, 그 자리가 성전의 터가 됩니다.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3~4)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하나님은 언제나 넘어진 자를 일으키는 데 먼저 나서십니다!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사탄이 일어나 다윗을 충동했고, 요압이 말렸으나 왕의 명령이 이겼고, 하나님이 치시자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충동, 셈, 그리고 고백입니다.
"적을 물리치는 승리보다 더 위대한 승리는 죄를 인정하는 회개입니다. …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승전의 현장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너진 회개의 자리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 크레이그 그로쉘
무너진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계획은 타작마당으로, 성전으로, 그리고 그 언덕에서 천 년 뒤에 드려질 십자가의 제사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가장 잘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사탄은 광야가 아니라 왕궁에서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둘째, 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의지하며 세는가가 문제입니다. 백성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셋째, 무너진 자가 다시 일어서는 첫걸음은 정직한 고백입니다.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점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오늘의 찬송이 새 342장 〈너 시험을 당해〉입니다. 승리의 자리에서 찾아오는 시험 앞에,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붙드는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342장 〈너 시험을 당해〉 — 오늘의 찬송.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 1절, 승리의 정점에서 찾아온 충동 앞에 선 다윗과 우리의 노래입니다.
〈십자가 그 사랑〉(경배와 찬양) — "돌 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8절, 미련하게 행한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은혜를 노래합니다. 고백과 결단의 자리에서.
새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5절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 손에 쥔 숫자보다 주님이 더 귀하다는 고백입니다. 파송 찬송으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다윗은 승리의 정점에서 "그 수효를 알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의지하며 세고 있는 숫자는 무엇입니까? 잔고입니까, 성과입니까, 사람의 수입니까, 평판입니까?
다윗은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실패를 감추거나 책임을 돌리지 않고,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사역의 규모와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소서.
우리 공동체 안에 "어찌하여"라고 말해 줄 요압의 목소리를 주시고, 그 말을 들을 귀를 주소서.
은혜가 아니면 한순간도 바로 설 수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어제의 믿음을 내세워 자신하지 않고, 오늘 말씀을 살펴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게 하소서.
마음과 눈에 하나님이 선명하여, 다른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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