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역대상 20:1-8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
본문: 역대상 20장 1절 ~ 8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앞뒤로 포위된 요압을 보았습니다. 앞에는 암몬, 뒤에는 아람. 그 자리에서 요압은 "담대하라 …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9:13) 하고 싸웠습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 그 싸움 끝에 아람은 다윗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전쟁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해가 바뀌었고, 요압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갑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상한 한 줄이 끼어 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
18장부터 20장까지의 전쟁 기록은 블레셋으로 시작해서 블레셋으로 끝납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기록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리고 넘어졌을 때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1.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 (20:1~3)
"1 해가 바뀌어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요압이 그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암몬 자손의 땅을 격파하고 들어가 랍바를 에워싸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 요압이 랍바를 쳐서 함락시키매 2 다윗이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왕관을 빼앗아 중량을 달아 보니 금 한 달란트라 그들의 왕관을 자기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 그 가운데 백성을 끌어내어 톱과 쇠도끼와 돌 써래로 일하게 하니라 다윗이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이 모든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대상 20:1~3)
겨울 우기가 지나고 전쟁하기 좋은 봄이 돌아왔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입니다. 그런데 왕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한 줄은 사무엘하에서 밧세바 이야기의 문을 여는 문장이었습니다.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삼하 11:1)
역대기는 그 뒤에 이어지는 밧세바와 우리아와 나단의 이야기를 통째로 들어내고, 문틀만 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줄은 이제 이렇게 읽힙니다. "랍바를 포위하고 친 것은 다윗이 아니라 요압이었다!"
왜 침묵했을까요. 다윗을 깨끗하게 보이려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사람들은 다윗의 죄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역대기는 곧 21장에서 다윗의 다른 죄를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역대기가 침묵한 것은 죄를 덮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한 죄인을 다시 세워 약속을 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한 줄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먼저 경고입니다.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영적 위기는 모든 일이 잘되어 마음의 긴장을 놓아 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저께 다윗은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18:11) 하며 받은 예물까지 하나님께 구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암몬 왕의 관을 자기 머리에 씁니다. 승리의 영광을 스스로 취하는 모습에서, 느슨해진 영적 경계가 보입니다.
3절의 "톱과 쇠도끼와 돌 써래"는 잔혹한 처형이 아니라, 정복된 백성에게 맡긴 노역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써래는 흙덩이를 깨는 농기구입니다. 다윗의 조문 사절의 수염을 깎고 옷을 잘라 돌려보낸 하눈의 교만(19:4)이, 결국 온 나라의 굴복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모욕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혜입니다.
"왕관"이라는 말은 '둘러 씌우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 관은 암몬 왕의 것이었을 수도, 암몬의 신 밀곰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세상의 왕권과 우상이 자랑하던 영광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넘어옵니다. 왕관은 스스로 쟁취해 쓰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씌워지는 것입니다. 무게가 금 한 달란트, 30킬로그램이 넘습니다. 그 관을 쓴 시간은 아주 짧았을 것입니다. 넘어졌던 왕이 다시 관을 씁니다. 그것은 다윗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 용서의 문은 회개였습니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다윗은 윤리적 죄를 범했다. 사울은 종교적 죄를 범했다. 누가 용서받았을까? 다윗이 용서받았다.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역대기가 침묵한 그 이름을, 마태는 굳이 적습니다.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6)
역대기는 침묵으로, 마태는 기록으로 같은 것을 말합니다. 죄인의 계보를 통해 왕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이 쓰시는 사람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우리에게도 "예루살렘에 머문 해"가 있습니다. 서야 할 자리를 떠나 편한 자리에 머물렀던 시간, 그래서 무너졌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없던 일로 지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해로 우리 인생 전체를 정의하지도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사명의 자리를 맡기십니다.
2. 그들이 항복하였더라 (20:4~5)
"4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과 게셀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키가 큰 자의 아들 중에 십배를 쳐 죽이매 그들이 항복하였더라 5 다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할 때에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이 사람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대상 20:4~5)
"그들이 항복하였더라." 사무엘하의 같은 기록에는 없는 말입니다. 역대기가 덧붙였습니다. 이 말은 1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17:10)와 같은 단어입니다. 블레셋이 무릎 꿇은 것은 십브개의 힘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키가 큰 자"는 르바임, 거인 족속입니다. 사백 년 전 가나안을 정탐한 이스라엘 백성을 떨게 했던 바로 그 족속입니다.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그 메뚜기의 후손들이 오늘 거인을 하나씩 쓰러뜨립니다. 이제야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다 끝내지 못한 정복을 다윗과 그 용사들이 마침내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아직 이것을 안식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안식은 평화의 아들 솔로몬의 때에, 성전과 함께 옵니다(22:9). 하나님의 목표는 전쟁의 승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집입니다.
5절에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가 나옵니다. 골리앗은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의 가족은 남아 있었습니다. 창 자루가 베틀 채 같은 그 동생이 또 나타납니다.
다윗이 소년 시절 골리앗 앞에서 외친 고백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
이스라엘의 무적의 용사는 다윗이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5)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싸웁니다. 히브리서가 그 긴장을 정확히 말합니다.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히 2:8)
우리 삶에도 골리앗의 아우가 있습니다. 이겼다고 생각한 죄의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들고, 끝났다고 여긴 두려움이 다른 얼굴로 찾아옵니다. 그것은 약속이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약속이 우리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원수는 이미 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패배가 온전히 드러나는 날을 교회는 아직 기다립니다.
골리앗은 십자가에서 쓰러졌고, 우리는 지금 골리앗의 아우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미 적혀 있습니다. "그들이 항복하였더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
3.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20:6~8)
"6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곳에 키 큰 자 하나는 손과 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넷이 있는데 그도 키가 큰 자의 소생이라 7 그가 이스라엘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8 가드의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 (대상 20:6~8)
골리앗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가드에서 또 골리앗을 만납니다. 상대를 얕보고 그 명예를 짓밟으며 싸움을 걸어오는 도발합니다. 그리고 그 거인을 쓰러뜨린 사람은 다윗의 조카 요나단입니다.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다윗은 이제 자신과 같은 '작은 다윗들'을 일으킵니다. … 참된 지도자는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할 이들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8절의 "죽었더라"는 '쓰러지다', '엎드러지다'라는 말입니다. 골리앗이 다윗의 물맷돌에 맞아 땅에 엎드러지던 그 장면이 되울립니다. 그때는 홀로 선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이제는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거인 족속을 넘어뜨립니다. 왕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승리가 온 백성의 승리로 넓혀졌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다윗은 한 번도 칼을 들지 않습니다.
랍바 : 요압이 쳤습니다
십배 : 십브개가 쳤습니다
라흐미 : 엘하난이 쳤습니다
손가락 여섯의 거인 : 요나단이 쳤습니다
그런데 기록은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입니다. 신하의 승리가 왕의 이름으로 기록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넘어졌던 그 해에, 하나님은 신하들의 손으로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여러 사람이 함께 지도하고 함께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교회의 승리도 그렇습니다. 강단에 선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닙니다. 새벽마다 무릎 꿇는 성도, 사랑방에서 한 사람을 붙드는 리더,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는 교사의 손이 거인을 쓰러뜨립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록됩니다.
진짜 다윗의 자손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골리앗을 홀로 쓰러뜨리셨습니다. 칼이 아니라 십자가로. 그리고 이제 그분은 '작은 다윗들'을 세우십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 14:12)
어제 요압은 "담대하라" 하면서도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도 "담대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릅니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요압 :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님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이미 이기신 왕의 신하로 남은 전투를 싸웁니다. 그 무기는 입어야 무기입니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0~11)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예루살렘에 머문 왕, 항복한 거인, 그리고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오순절에 그의 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그의 실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였습니다.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8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 7:8)
한 젊은 수도사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오랫동안 명상도 하고 고행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지 아는가? 취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취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깨어 있어야만 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평안할 때 깨어 있으십시오. 왕들이 출전할 때 예루살렘에 머문 그 자리가 넘어짐의 자리였습니다.
둘째, 넘어졌다면 돌아오십시오. 역대기의 침묵은 죄를 덮는 침묵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왕관은 위로부터 씌워집니다.
셋째, 혼자 싸우지 마십시오. 거인은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쓰러졌습니다. 이미 이기신 왕의 이름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함께 싸웁니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오늘의 찬송이 새 352장 〈십자가 군병들아〉입니다.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 믿으라 복음의 갑주 입고 늘 기도하면서 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 오늘 하루, 내 맡은 자리에서 이긴 왕의 군사로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352장 〈십자가 군병들아〉 — 오늘의 찬송.
"기 들고 앞서 나가 담대히 싸우라." 요압과 십브개와 엘하난과 요나단처럼, 이미 이기신 왕의 군대로 남은 전투에 나서는 찬송입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은혜 아니면〉
넘어진 왕이 다시 관을 쓰는 것은 은혜뿐입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온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결단의 자리에서.
새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 그 침묵 뒤에 놓인 회개와 회복을 노래합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기도의 찬송으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다윗이 무너진 자리는 전쟁터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문 안락한 자리였습니다.
지금 평안하다고 느끼는 내 삶의 자리 가운데, 영적으로 방심하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 무엇으로 깨어 있겠습니까?
거인들은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쓰러졌습니다.
혼자 감당하려다 지친 싸움이 있습니까?
이번 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울 '작은 다윗'으로 누구를 세우고, 누구의 곁에 서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깨어 기도하며 편한 자리를 주장하지 않고 십자가의 승리를 함께 이루어가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이름 없이 자기 자리에서 싸우는 사랑방장과 교사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손으로 쓰임 받게 하소서.
형통함을 누릴 때 더욱 겸손하고 신실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리에서 여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거인 같은 문제를 작게 보고 하나님을 크게 보는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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