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역대상 12장 1-22절
날마다 와서 도우매
본문: 역대상 12장 1절 ~ 22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스무두 절이 통째로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명단 끝에 암몬 사람 셀렉, 모압 사람 이드마, 헷 사람 우리아가 있었습니다. 율법이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리라" 한 사람들이 왕의 용사 명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물음이 남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 온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이 그 답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1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대상 12:1)
어제 11장에서 다윗은 이미 왕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기름을 부었고, 여부스를 취해 다윗성을 삼았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점점 강성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12장이 시작되자마자 카메라가 뒤로 돌아갑니다. 왕궁에서 도피처로, 예루살렘에서 시글락으로.
플래시백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헤브론에서 시작해 과거로, 시글락으로, 더 먼 광야 요새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는 기법입니다. 흩어져 있던 과거의 모든 지지자가 결국 현재의 왕권 확립을 향해 모여드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명단의 뒷면입니다. 어제 우리가 본 그 이름들이 언제, 어떤 형편의 다윗에게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오늘 새벽의 한마디가 서 있습니다. 직역하면 "당신을 돕는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시니이다."
1. 사울의 동족이 사울을 떠났습니다 (12:1~7)
"2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3 그 우두머리는 아히에셈이요 다음은 요아스이니 기브아 사람 스마아의 두 아들이요" (대상 12:2~3)
그들은 사울과 같은 지파 사람들입니다. 우두머리 둘은 "기브아 사람", 곧 사울의 고향 사람입니다. 그들이 사울의 원수로 쫓기는 도망자에게 왔습니다. 이웃이자 친척인 사울을 직접 보고 자랐습니다. 그의 외모와 말을 보았고 들었고 그의 멋진 왕궁도 보았습니다. 백 번이라도 혈연인 왕의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글락으로 다윗에게" 왔습니다.
활은 베냐민 지파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활 쏘는 자에게 쫓겨서 도망쳤습니다.
"사울을 맹렬히 치며 활 쏘는 자가 사울에게 따라 미치매 사울이 그 쏘는 자로 말미암아 심히 다급하여"(대상 10:3) 그리고 그 자랑스런 베냐민 지파의 활잡이들은 여기서 다윗의 편에 섰습니다.
"우리는 때로 익숙한 것, 고착된 관계에 매여 하나님이 실제로 일하시는 곳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속한 집단이나 익숙한 환경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는 장막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막을 걷어 내십니다."
우리의 결정도 대부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편이 어디인가? 정치로, 세대로, 학연으로, 심지어 교단으로. 그런데 오늘 본문은 스무세 사람의 이름을 대며 묻습니다. 혈연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입니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큰 대답을 훗날 또 한 사람의 베냐민 지파 사울에게서 받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5,7)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2. 줄 것이 없는 왕에게 온 사람들 (12:8~15)
"8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대상 12:8)
이제 시간이 더 뒤로 갑니다. 시글락보다 더 이른 때, 광야의 요새입니다. 아둘람 굴(삼상 22:1) 혹은 엔게디(삼상 23:29)로 봅니다. 그 시절 다윗에게는 왕관도, 군대도, 월급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 22:2)
그런데 역대기는 이 사람들을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고 부릅니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왕과 빼앗으려는 자의 구도가 아닙니다. 1절의 "숨어 있을 때에"가 아추르, '붙들려 있다', '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왕권은 이미 사울에게서 떠났지만, 아직 "막혀" 있었을 뿐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의 말씀 이후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한 단어가 우리 인생의 어떤 계절에 이름을 붙여 줍니다. 막혀 있는 시간.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분명한데 지금은 굴속인 시간. 그런데 성경은 그 시간에도 이미 그를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막혀 있는 왕에게 열한 사람이 옵니다. 요단 동편 길르앗에서, 아주 먼 데서, 아무 이득도 없는 사람에게 왔습니다.
"14 이 갓 자손이 군대 지휘관이 되어 그 작은 자는 백부장이요 그 큰 자는 천부장이더니 15 정월에 요단강 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에 이 무리가 강물을 건너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자에게 동서로 도망하게 하였더라" (대상 12:14~15)
정월에 요단강, 물이 모든 언덕에 넘칠 때,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눈 녹은 물이 다 내려와 강이 언덕을 넘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때 건넜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때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도하 역시 요단강 물이 넘쳐흐르던 시기에 일어났지만, 당시는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기적적으로 끊어지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 반면 갓 지파 용사들은 수위가 최고조에 달한 급류를 오직 자신들의 체력만으로 돌파한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물을 가르십니다. 어떤 때는 가르지 않으십니다. 그때도 건너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갈라지지 않은 강을 건넌 사람들도 똑같이 기록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깊은 물을 지나 불 가운데로 지나도 지켜주십니다. 지나면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과 놓치지 않는 민첩함이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에게 드립니다.
3. 한복판에 서 있는 한 말씀 (12:16~22)
"16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 17 다윗이 나가서 맞아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내게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 마음과 하나가 되려니와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넘기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매" (대상 12:16~17)
사람을 의심하는 다윗을 봅니다. "너희가 나를 속여 넘기려는 것이냐?"
근거 있는 의심입니다. 도엑에게, 그일라 사람들에게, 십 사람들에게 이미 배신당했기 때문입니다(삼상 21~26장). 그래서 다윗은 맹세로 충성을 시험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번 데인 자리는 다시 열기가 어렵습니다. 새로 오는 사람이 반갑지 않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판단을 자기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판단을 하나님께 넘깁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입니다.
"18 그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 이르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당신도 평안하고 당신을 돕는 자에게도 평안이 있을지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한지라 다윗이 그들을 받아들여 군대 지휘관을 삼았더라" (대상 12:18)
오늘 새벽의 정점이 여기입니다.
'감싸다'로 옮긴 히브리어 라바쉬의 본래 뜻은 '옷을 입다'입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영이 아마새를 옷 입으셨다"입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은 딱 세 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셈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샿 6:34)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대하 24:20)
기드온, 스가랴, 그리고 아마새. 셋뿐입니다.
"여전히 말씀하시는 성령은 뜻밖의 입을 통해 그의 말씀이 이미 말한 것을 백성에게 상기시키신다."
얼마나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었는지, 목사도, 제사장도 아닌 군인도 예언합니다.
이 신택의 구조를 보십시오. 다윗의 말(17절)과 아마새의 말(18절)이 "평안(샬롬)"과 "돕다(아자르)"를 되풀이하며 정확히 맞물립니다.
"다윗의 말에서는 '나를 돕고자 하면'이라는 인간적 조건으로 제시되지만, 아마새의 응답에서는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라는 구원의 확인으로 응답된다. 다윗이 두려워한 '하나님의 심판자 되심'이 아마새의 선언에서 '하나님의 돕는 자 되심'으로 역전된다."
심판해 주십사 했더니, 도와주고 계시다는 대답이 왔습니다!
"돕다"라는 히브리어 아자르가 구약에 여든한 번 나오는데, 그중 스물다섯 번이 역대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 나오는 이탈자들의 이름 자체가 '도움'입니다. 3절의 아히에셈("내 형제는 도움이다"), 6절의 요에셈("여호와는 도움이시다"), 9절의 에셈("도움"). 도우러 온 사람들의 이름이 '도움'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면입니다. 므낫세 사람들이 옵니다. 길보아 전투 직전입니다.
"20 다윗이 시글락으로 갈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그에게로 돌아온 자는 아드나와 요사밧과 여디아엘과 미가엘과 요사밧과 엘리후와 실르대이니 다 므낫세의 천부장이라 21 이 무리가 다윗을 도와 도둑 떼를 쳤으니 그들은 다 큰 용사요 군대 지휘관이 됨이었더라" (대상 12:20~21)
"조심스러운 자들", 실은 "지각한 자들"이라 불러도 될 사람들입니다. "길보아 산 전투 전날에야, 다시 말해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분명해진 때에야, 이 므낫세 무리는 다윗과 운명을 함께했다."
늦게 온 사람들입니다. 계산이 끝난 뒤에 온 사람들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가 떠오릅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2)
그런데 왕이 받으셨습니다. 이 겉보기 불공평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늦게 온 사람의 영리함조차 왕은 귀히 여기어 자기 목적에 쓰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한 절로 닫힙니다.
"22 그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대상 12:22)
사무엘상 27장 2절에 다윗과 함께한 사람이 육백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팔 년 뒤 헤브론에서는 "큰 군대"가 됩니다. 하루에 한 사람씩 온 것입니다. 그것이 쌓여 군대가 되었습니다.
맺는 말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한 줄로 꿰면 이렇습니다.
사울의 고향 사람들이 왔고(1~7절), 요단이 넘칠 때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왔고(8~15절), 의심받으면서 온 사람들이 왔고(16~18절), 한참 늦게 온 사람들이 왔습니다(19~21절). 그리고 날마다 왔습니다(22절).
그런데 이 모든 사람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은 사람의 결단이 아닙니다. 한마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이 한마디가 신약에서 이름을 얻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곁에 부르심을 받은 이', 곧 곁에서 돕는 이라는 뜻입니다. 아마새가 가리킨 그 도움이 성령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새를 옷 입으신 그 영은 예수님의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아마새 한 사람을 입히셨던 그 영이, 오순절에 온 교회를 입히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것은 이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서 사람을 보내십니다. 사울의 고향 사람이 다윗에게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하나님이 붙여 주신 동역자가, 여러분이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온 사람일 수 있습니다.
둘째, 막혀 있는 시간에도 이미 왕이십니다. 아추르, 막혀 있음. 그 시간은 하나님이 잊으신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모으고 계신 시간입니다.
셋째, 사람을 모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연합하고 있다면, 그 추진력은 좋은 프로그램도 좋은 지도자도 아닙니다. "당신을 돕는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오늘의 찬양
새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네" — 12장 18절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와 시편 121편이 그대로 겹칩니다.
새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 "막혀 있는"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기브아 사람들은 혈연 대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택했습니다(12:1~7).
지금 내 판단을 미리 정해 놓고 있는 '내 편'은 무엇입니까?
그 편견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를 보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윗은 세 번이나 배신당한 상처를 안고도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고, 그때 하나님이 뜻밖의 사람의 입으로 대답하셨습니다(12:17~18).
내가 상처 때문에 아직 문을 열지 못한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의 연합이 사람의 계획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라는 말씀 위에 서게 하시고, 날마다 한 사람씩 돌아와 돕는 걸음이 쌓여 "하나님의 군대와 같은"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지금 '막혀 있는' 시간을 지나는 우리 지체들, 일이 열리지 않고, 병이 낫지 않고,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형제자매들에게, 그 시간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모으시는 시간임을 믿게 하시고, 갈라지지 않은 강도 건너게 하는 담대함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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