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에스겔 36장 32-38절
- 박정배

- 9시간 전
- 4분 분량
황무지가 에덴동산이 되기까지
본문: 에스겔 36장 32절 ~ 38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새 영과 새 마음, 하나님의 심장 이식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위대한 구원 신탁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진 백성에게 이제 삶의 터전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혼의 위로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의 재건으로, 공동체의 번성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결론부에 뜻밖의 두 마디가 박혀 있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32절)라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37절)라는 요청입니다. 은혜의 절정에서 왜 수치를 명하시고, 확정된 약속 앞에서 왜 기도를 요구하십니까. 오늘 새벽 이 두 역설을 붙들고 황무지가 에덴동산이 되는 길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 은혜는 우리를 거룩한 부끄러움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32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36:32)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로 레마안켐)가 22절에 이어 다시 선포되며 단락 전체를 감쌉니다. 회복의 동기가 이스라엘의 공로나 자격에 있지 않다는 것을 처음과 끝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명령이 우리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원문을 보면 '부끄러워하라'(보슈)는 능동 명령형이고 '한탄하라'(히칼레무)는 수동형입니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그 수치의 상태 안에 자신을 두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명령의 위치입니다. 은혜의 선언이 다 끝난 후에 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구원이 수치를 제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회복 신학에서 은혜는 오히려 더 깊은 수치를 불러일으킵니다. 값없는 용서를 받고 보니, 내가 얼마나 그 은혜에 합당하지 않았는지가 뼈저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우리를 짓누르는 정죄가 아닙니다. 단순한 창피함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거룩한 부끄러움입니다. 완악한 자아를 깨뜨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언약 관계로 나아가게 만드는 참된 회심과 영적 성숙의 징표입니다. 구원이 내 공로가 아님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붙들며 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평생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고백한 것은 자학이 아니라, 긍휼을 입은 자의 감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은혜 앞에서 솟아오르는 거룩한 수치심 — 그것이 우리를 새롭게 빚어 가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2. 하나님의 회복은 황무지를 에덴동산으로 바꿉니다 (33~36절)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36:35)
회복의 그림이 구체적으로 펼쳐집니다. 성읍에 사람이 거주하고, 폐허가 건축되고,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땅이 경작됩니다(33~34절). 그리고 35절의 탄성 —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같이 되었고." 원문은 '황폐한 것'(하솨마)과 '에덴동산 같음'(케간 에덴)이라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두 극단을 한 문장 안에 배치합니다. 에스겔은 이 한 문장에 창조론과 심판론과 구원론과 종말론을 압축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얼마나 파격적이고 근원적입니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질서와 아름다움과 충만함으로의 재창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온전한 교제를 누리던 낙원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사 51:3). 그리고 이 변화의 증인은 뜻밖에도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36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조롱하며 그 땅을 탐냈던 바로 그들이(35장), 황무지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며 이것이 여호와의 솜씨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36절 마지막 문장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원어로 '딥바르티 베아시티' —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성취의 보증입니다. 오늘 묵상 에세이의 간증이 이 진리를 아프게 보여 줍니다. 한 찬양 사역자가 남편의 투병을 '영광 프로젝트'라 이름 붙이고 간구했지만 남편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폐허에서 그녀는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 잘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치부했던 제 믿음의 민낯을 보았어요.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계속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이 무너진 곳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우리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황무지에서 에덴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3. 확정된 약속도 기도로 구하는 자에게 성취됩니다 (37~38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6:37)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하신 하나님이 곧바로 덧붙이십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인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여기 '구하다'로 번역된 '다라쉬'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나아갈 때 쓰던 단어입니다. 간절히, 적극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두 번이나 "내가 그들에게 물음을 받지 아니하리라"(14:3, 20:3) 하시며 기도의 문을 닫으셨던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에스겔서에서 처음으로 "내가 구함을 받아 주리라" 하시며 귀를 다시 여신 것입니다. 관계가 근본적으로 회복되었다는 표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을 수동적 방관자로 세워 두지 않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간절히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하는 것 — 하나님의 구원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미 확정된 하나님 나라를 두고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약속을 붙드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동역자로 드리는 순종입니다.
기도의 결과가 38절에 장관으로 펼쳐집니다.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유월절이면 전국에서 예루살렘 거리를 가득 메우던 흠 없는 양 떼 — 제사장 가문에서 자란 에스겔이 생생히 기억했을 그 장면입니다. 원문은 '거룩한 양 떼'(케촌 코다쉼)와 '예루살렘 절기의 양 무리'라는 두 표현을 겹쳐 놓았습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그저 숫자가 늘어난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진 거룩한 예배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수치와 멸망의 땅이었던 곳이 온 삶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의 땅이 됩니다(롬 12:1). 이것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입니다. "죽어도 놓지 말아야 할 한 가지 꿈이 있다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며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마크 뷰캐넌). 기도는 성도의 위대한 사명입니다. 무너진 곳을 재건하고 황폐한 자리에 생명을 심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 역사의 동역자로 부르십니다.
맺는 말
은혜는 우리를 거룩한 부끄러움의 자리로 데려가고, 하나님의 회복은 황무지를 에덴동산으로 바꾸며, 확정된 약속도 붙들고 기도하는 자에게 성취됩니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금요일 새벽입니다. 내 삶의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자리 — 하나님은 바로 그곳을 "내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하십니다. 오늘 하루, 은혜 앞에서 겸손히 부끄러워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에덴을 꿈꾸며, "그래도 구하라" 하신 초청을 따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추천 2~3곡)
새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 오늘의 찬송.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 황폐한 내면을 에덴으로 회복시키시는 은혜의 기도입니다.
새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 "그래도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37절)는 부르심을 따라,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통로임을 고백하게 하는 찬송입니다.
구하라 모든 열방들을 — 구하되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합시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습니까? 값없이 받은 용서 앞에서 마지막으로 거룩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언제였는지 돌아봅시다. 그 자리에서 떠나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 중에 '어차피 이루어질 것'이라며 기도를 멈춘 것, 혹은 '불가능하다'며 포기해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부터 그 약속을 붙들고 "이루어 주옵소서" 구체적으로 구하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절기의 양 무리같이 거룩하게 구별된 예배 공동체로 가득 차게 하시고, 황폐했던 자리마다 사람의 떼로 채우시는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주소서.
성도들이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기도하는 동역자로 서게 하시며, 무너진 계획과 좌절의 자리에서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따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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