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에스겔 36장 1-15절
- 박정배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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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본문: 에스겔 36장 1절 ~ 15절
여는 말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세일산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같은 형식으로 정반대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1절). 세일산을 향하던 얼굴이 이스라엘 산들을 향해 돌아선 것입니다. 35장과 36장은 한 예언의 두 반쪽입니다. 저주받은 산과 회복될 산, 황폐해질 에돔과 다시 열매 맺을 이스라엘. 오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산들에게, 곧 짓밟히고 조롱당한 땅 그 자체에게 복음을 설교하라고 명하십니다. 황폐한 땅은 포로들의 무너진 내면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 폐허 같은 마음을 안고 새벽에 나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전보다 더 낫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맹렬한 질투는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입니다 (1~7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내 맹렬한 질투로 남아 있는 이방인과 에돔 온 땅을 쳐서 말하였노니 이는 그들이 심히 즐거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심령으로 내 땅을 빼앗아 노략하여 자기 소유를 삼았음이라" (36:5)
원수들은 환호했습니다. "아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2절).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에돔과 주변 민족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 땅을 삼키고, 남은 산들은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3절)가 되었습니다. 3절의 원문에는 기소의 접속사 '야안'(~때문에)이 이중으로 반복됩니다. 성경에서 매우 드문 이 어법은 죄악이 겹겹이 쌓였음을 압축하는 수사입니다. 그런데 이 기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내 맹렬한 질투로", 원어로 '킨아티 베에쉬' — "내 질투의 불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질투는 배타적 소유권을 향한 격렬한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왜 질투하십니까. 5절이 답합니다. 그들이 빼앗은 것이 "내 땅"(아르치)이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들의 눈에 그 땅은 이미 잃어버린 땅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신 땅이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가 '이미 끝났다'고 여기는 자리에서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입니다. 사랑이 식은 사람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지주는 세입자가 쫓겨난 빈 땅에 누가 들어와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짓밟힌 산들 하나하나 —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과 황폐한 사막들과 버린 성읍들"(4절) — 을 일일이 부르시며, 당신의 것을 건드린 자들에게 손을 들어 맹세하십니다.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이 자신들의 수치를 반드시 당하리라"(7절). 성도 여러분, 원수가 여러분의 가정을, 건강을, 사역을 조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맹렬한 질투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의 편에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돌이키실 때 황무지는 생명의 땅이 됩니다 (8~12절)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리니 그들이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 (36:8)
8절에서 분위기가 급전환됩니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7절까지의 심판 선언이 끝나자마자 회복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9절 말씀이 놀랍습니다.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히브리어 '힌네니 알레켐'은 에스겔서 전체에서 늘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라는 심판 공식으로 쓰이던 표현입니다. 어제 세일산이 들은 바로 그 말입니다(35:3). 그런데 오직 여기서만 이 표현이 "내가 너희 편이다"라는 헌신 선언으로 바뀝니다!! 앨런(Allen)은 이것을 "한 글자 차이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하나님의 얼굴이 심판에서 은혜로 돌아서는 전환 — 이것이 에스겔 33~37장 전체의 구조이며, 십자가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방향 전환의 예표입니다. 진노하시던 그 열심(킨아)이 이제 같은 강도로 회복을 위해 불타는 것입니다.
회복의 내용을 보십시오. 산들이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고, 사람이 갈고 심고, 성읍마다 사람이 거주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게"(11절) 됩니다. 여기 '번성하다'(파라)는 창세기 1장 28절 창조 명령의 바로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황폐해진 땅에 창조의 언어를 다시 선포하십니다. 회복은 수리가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게다가 히브리어로 '에돔'과 '아담'(사람)은 같은 자음입니다. 에돔은 황폐해지지만 그 자리에 아담이 번성하는 언어유희 속에,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이 들어차는 역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의 정점 —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하나님의 회복은 원상 복구가 아니라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의 회복입니다. 욥의 마지막이 처음보다 복되었듯이(욥 42:12),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월조차 은혜의 재료로 삼으십니다.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백성이 돌아오기 전에 산들이 먼저 열매를 준비합니다(8절). 회복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고 계신 세심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지금 내 상황이 메마른 산처럼 보여도, 주님은 이미 회복의 자리를 단장하고 계십니다.
3. 수치의 이름을 소망의 이름으로 바꾸십니다 (13~15절)
"내가 또 너를 여러 나라의 수치를 듣지 아니하게 하며 만민의 비방을 다시 받지 아니하게 하며 네 나라 백성을 다시 넘어뜨리지 아니하게 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 (36:15)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 붙은 오래된 별명 하나를 다루십니다. "너는 사람을 삼키는 자요"(13절). 이 말은 가나안 정탐꾼들의 부정적 보고 — "그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민 13:32) — 에서 비롯되어 천 년 가까이 따라다닌 오명이었습니다. 실패와 상실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겠는가 하는 포로들의 두려움이 그 별명에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수치의 이름을 직접 거두십니다. "네가 다시는 사람을 삼키지 아니하며"(14절). 원문은 절대 부정어와 '오드'(다시는)를 겹쳐 미래에 대한 확정적 부정을 선언합니다. 여기 '수치를 듣다'(샤마)라는 동사가 의미심장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다'는 들은 것을 내면화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전인적 수용을 뜻합니다. 열방의 조롱을 '듣는다'는 것은 그 조롱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그것의 철폐입니다. 세상의 조롱이 내 정체성을 규정하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선언이 나를 규정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과거의 수치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와 정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 수치의 형틀인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소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선언할 수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원수가 부르는 수치의 이름 — 실패자, 삼키는 자, 버림받은 자 — 은 하나님 앞에서 힘을 잃고,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소망의 이름이 우리를 새롭게 규정합니다. 이 회복의 복음 앞에서 냉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 묵상 에세이의 권면처럼, 냉소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의 관점으로 보면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흘린 모든 땀방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의 맹렬한 질투는 끝났다고 여긴 자리에서도 꺼지지 않은 사랑의 불꽃이었고,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로 바뀌는 한 글자의 전환 속에 십자가의 복음이 예비되어 있었으며, 하나님은 처음보다 낫게 회복하시고 수치의 이름을 거두어 가십니다. 오늘 하루, 폐허처럼 보이는 내 삶의 산들을 향해 하나님의 회복 선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의 비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규정하게 하며, 냉소 대신 복음의 열정으로 열매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추천 2~3곡)
새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 오늘의 찬송.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신다는 약속의 고백이, 황폐한 산들 위에 다시 생명을 약속하시는 본문과 맞닿습니다.
새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 수치가 소망으로 바뀌는 15절의 역전을 그대로 노래합니다.
새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 메마른 산 같은 상황에서도 회복을 준비하시는 '나의 믿음 붙드시는' 주님을 신뢰하게 하는 찬송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내 삶의 어떤 자리를 '이미 끝난 땅'으로 포기했습니까? 그 자리를 "내 땅"이라 부르시며 질투의 불로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오늘 그 자리를 위해 무엇을 다시 기도하겠습니까?
나를 규정해 온 '수치의 이름'(실패의 기억, 사람들의 평가, 오래된 별명)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그 수치를 담당하신 주님 앞에서, 오늘 그 이름 대신 어떤 하나님의 선언을 붙들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냉소가 아닌 복음의 열정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평범한 일상의 모든 수고 — 자녀 양육, 직장의 노고, 교회 섬김 — 가 부활의 관점에서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게 하소서.
성도들 각자의 황폐한 산들 위에 "처음보다 낫게" 하시는 재창조의 회복을 이루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세일산과 이스라엘 산, 에돔과 이스라엘, 에서와 야곱, 맹렬한 질투와 끈질긴 사랑, 심판과 회복. 하나님은 정반대의 결말을 통해 하나님 편에 선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역사 속에 계시하셨고, 지금도 그 예언을 성취하고 계신다.
에스겔 33장에서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여시고 돌연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을 전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과정에는 형제 민족임에도 원수가 되었던 에돔의 심판 선언(35장)을 거쳐야 했다. 이미 성은 무너졌고 많은 사람이 죽음과 포로의 자리로 끌려가 황폐해진 이스라엘 땅을 두고 두 시선이 교차한다. 에돔은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겔35:10)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황폐한 사막들과 버린 성읍들에 계셨고, 에돔의 조롱과 비방을 들으셨다.
이스라엘이 절망과 낙심 속에 있을 때, 그들의 원수는 조롱하며 그 땅을 삼키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산들을 훑으시며 회복의 말씀으로 임하신다. 세일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