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에스겔 33장 21-33절
- 박정배

- 1일 전
- 4분 분량
듣는 자에서 행하는 자로
본문: 에스겔 33장 21절 ~ 33절
여는 말
오늘 본문으로 7월 한 달 에스겔 1~33장의 여정, 곧 심판 선포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마침내 그 소식이 도착합니다. "그 성이 함락되었다"(21절). 에스겔이 십여 년 동안 나팔을 불며 경고해 온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소식 앞에 선 세 부류의 사람을 보여 줍니다.
입이 열린 선지자(21~22절), 폐허 위에서 여전히 권리를 주장하는 본토 잔류민(23~29절), 그리고 설교를 즐겨 듣지만 행하지 않는 포로민 청중(30~33절). 심판이 성취된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느냐. 내일부터 시작될 34장 이하의 회복의 복음을 받기 전에, 오늘 우리의 들음의 자리를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1. 최악의 소식이 말씀의 신실함을 증언합니다 (21~22절)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33:22)
주전 586년 여름 예루살렘이 불탔고, 다섯 달 남짓 지난 주전 585년 1월, 첫 포로 행렬에 끌려온 한 생존자가 에스겔 앞에 섰습니다. 히브리어로 '팔리트', 피난자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짧은 두 마디 — "성이 함락되었다."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전이 무너졌고, 다윗의 왕좌가 끊어졌고, 약속의 땅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최악의 소식이 도착하기 전날 저녁, 여호와의 손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의 입을 여셨습니다. 소명 초기에 부과되었던 "잠잠하라"는 제한(3:26)이 십여 년 만에 풀린 것입니다. 이것은 24:25~27에서 예고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성이 무너지는 날짜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소식이 바벨론 땅에 도착하는 아침까지 정확히 아시고 그 전날 저녁에 선지자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을 봅니다.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패배 선언처럼 들립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마르둑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그 함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오히려 여호와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도성과 성전의 파괴까지도 확고히 다스리시는 분이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선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심판의 말씀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졌다면, 이제부터 선포될 회복의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무너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하나님이 지셨다"가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라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위에 선 사람에게는 폐허조차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가 됩니다.
2. 폐허 위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교만이 있습니다 (23~29절)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사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33:24)
성이 함락된 후 그 폐허에 남겨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농사를 위해 남겨 둔 "그 땅의 가난한 자들"(왕하 25:12)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한 사람으로도 이 땅을 차지했다. 우리는 많으니 이 땅은 더욱 우리 것이다." 그럴듯하게 아브라함을 인용하지만, 이 논리에는 하나님의 맹세도, 언약도, 순종도 없습니다. 오직 머릿수 계산만 있습니다. 블록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이 적자생존의 물질주의로 대체되었다"라고 진단합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를 은혜가 아니라 자격의 증거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먹인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땅에서 평생 나그네('게르')로 살았고, 사라를 묻을 밭 한 뙈기조차 헷 사람에게 값을 치르고 사야 했던 사람입니다(창 23장). 그는 땅을 움켜쥔 자가 아니라 약속을 붙든 자였습니다(히 11:13).
하나님의 반박은 준엄합니다. 너희가 피째 먹으며, 우상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며, 칼을 의지하며, 가증한 일을 행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고도 — "그 땅이 그래도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25~26절). 유업의 언어는 남았는데 언약의 삶은 사라졌습니다. 신앙의 용어를 쓴다고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똑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 8:39). 세례 요한은 이미 경고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역사의 교훈 앞에서도 회개 대신 권리 주장을 택하는 마음, 재난에서 살아남은 것을 공로로 착각하는 마음 — 이것이 폐허 위의 교만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교회 안에서의 연차와 직분과 헌신의 이력이 순종 없는 권리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듣기 좋아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30~33절)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3:31)
마지막 장면은 뜻밖에도 에스겔의 '성공'입니다. 예언이 성취되자 에스겔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담벼락 곁에서, 집 문간에서 사람들이 서로 말합니다. "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들어 보자"(30절).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그 앞에 앉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보다 부흥한 사역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실상을 알려 주십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마음은 이익('베차', 부당 이득)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에스겔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32절)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선포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가 오락으로 소비된 것입니다. "선포에 목숨을 건 예언자가 쇼맨으로 가볍게 갈채를 받는다." 설교를 즐겨 듣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받았다는 감탄이 순종을 대체할 때, 예배당은 공연장이 되고 회중은 관객이 됩니다.
주님도 이 본문을 아셨던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들음의 무게는 행함으로만 증명됩니다. 그리고 33절의 마지막 약속을 보십시오.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이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에게서 절정에 이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참 선지자(신 18:15)를 사람들은 구경거리로 대했습니다. 헤롯은 이적 보기를 바랐고(눅 23:8), 무리는 표적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그 말이 응할 때에" 백부장이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말씀이 응하는 그날, 우리가 순종한 자로 서 있을 것인가, 구경만 한 자로 서 있을 것인가입니다.
맺는 말
성이 함락되었다는 최악의 소식은 말씀의 신실하심의 증거였고, 그러므로 내일부터 펼쳐질 회복의 복음(34~48장)도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 앞에 서는 자세가 문제입니다. 폐허 위에서도 권리만 주장하는 교만이 아니라 회개로, 고운 노래를 즐기는 관객이 아니라 행하는 제자로 서야 합니다.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달 동안 들은 말씀 가운데 아직 행함으로 옮기지 못한 한 가지를 오늘 순종으로 바꾸어, 말씀이 응하는 날에 부끄럽지 않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추천 2~3곡)
새찬송가 529장 <온유한 주님의 음성>
새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 듣고 행하는 자와 모래 위에 짓는 자를 대비하는 오늘 본문(31~32절, 마 7:24~27)의 주제 찬송입니다.
새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 토기장이이신 주님 앞에 내 권리 주장을 내려놓고, 들은 말씀대로 빚어 주시기를 구하는 순종의 기도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지금 내 인생의 무너진 자리를 나는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로 읽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되었으니 회복의 말씀도 이루어진다"는 신뢰로 읽습니까?
나는 설교와 말씀을 '즐겨 듣는 자'입니까, '그대로 행하는 자'입니까? 이번 한 달 들은 말씀 중 은혜만 받고 순종하지 않은 한 가지는 무엇이며, 오늘 그것을 어떻게 행하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설교를 소비하는 관객의 자리가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제자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은혜의 감탄이 반드시 순종의 발걸음으로 이어지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8월 한 달 에스겔 34~48장의 회복의 말씀을 받기에 앞서, 우리 안의 교만한 권리 주장을 회개로 내려놓고 약속을 붙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회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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