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에스겔 33장 10-20절
- 박정배

- 1일 전
- 4분 분량
돌이키고 돌이키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본문: 에스겔 33장 10절 ~ 20절
여는 말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다시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팔 소리를 들은 백성의 반응은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10절)입니다. 마침내 자기 죄를 인정했지만, 그 고백은 회개가 아니라 체념이었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회개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18장의 신 포도 속담이 "조상 탓"이라는 책임 회피였다면, 이제는 "우리 죄가 너무 커서 끝났다"는 절망이 포로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영적 파산 선언 앞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걸고 맹세하시며 외치십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11절). 오늘 새벽, 절망의 탄식에 생명의 맹세로 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 절망의 탄식에 하나님은 생명의 맹세로 답하십니다 (10~11절)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33:11)
10절에서 백성이 "쇠퇴하게 하니"라고 말할 때 쓰인 히브리어 '마카크'는 시체가 썩어 문드러지는 부패의 언어입니다. 레위기 26장의 언약 저주에 등장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죄악의 무게에 영혼과 육신이 괴저처럼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로들은 자기들이 살아 있으나 이미 죽어 가는 자들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참 회개가 아니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부르짖었던 것처럼, 이것은 죄를 슬퍼하는 회개가 아니라 고통의 해소를 구하는 부르짖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없이 압박에서 벗어나기만 바라는 공허한 탄식… 우리의 기도도 얼마나 자주 이 자리에 머무는지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그 불완전한 탄식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어찌 살리요"라는 마지막 질문을 붙잡으십니다. 백성이 마침내 생명의 문제를 꺼냈으니, 가르칠 만한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성경 전체에서 가장 뜨거운 선언 중 하나가 터져 나옵니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거시는 맹세입니다.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지켜보며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기쁨은 악인에게조차 생명에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선포조차 멸망이 아니라 돌이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심판은 구원의 선행 단계였습니다. 여호와는 다시 심기 위하여 뽑으십니다(렘 1:10). "돌이켜 떠나서"의 '슈브'는 33장에 집요하게 반복되는 단어인데, 감정의 뉘우침이 아니라 가던 길에서 180도 방향을 트는 실천적 행위를 말합니다.
회개는 눈물이 아니라 유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끝내지 않으시고 애타게 물으십니다. "어찌 죽고자 하느냐." 죽음은 필연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이 열려 있는데 왜 굳이 죽음을 선택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묵상 에세이에서 C. S. 루이스는 지옥을 "하나님을 차단하려는 죄인의 바람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그곳에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2.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12~16절)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33:16)
12절에서 하나님은 공의의 작동 원리를 선언하십니다.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악인이 돌이키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합니다. 여기 '이카쉘'은 발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과거의 죄악이 결코 발목을 잡지 못한다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사람의 끝은 경주를 어떻게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마치는가로 결정된다.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의인과 악인은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오늘의 방향입니다. 과거의 신앙 경력을 스스로 믿고 기대는 순간 의인이 넘어지고(13절), 과거의 죄에 절망하던 자가 오늘 돌이키면 삽니다.
그리고 회개의 내용이 구체적입니다. 전당물을 도로 주고,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는 것(15절). 회개는 머릿속 결심이 아니라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17). 그런데 16절의 선언을 보십시오.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부분 사면이 아니라 완전한 삭제입니다. 하나님은 돌이킨 자의 과거 이력서를 들추지 않으십니다. 이 선언은 어디에서 완성됩니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의 아들에게 지우시고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선언하셨습니다. 에스겔 33장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하신 맹세는, 갈보리에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으로 지불되었습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를 보십시오. 평생을 악인으로 살았어도 마지막 순간 돌이킨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미래를 결정합니다!!
3. 공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우리의 길입니다 (17~20절)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33:20)
이 압도적인 은혜의 선언 앞에서 백성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17절). 평생 의롭게 산 사람과 마지막에 돌이킨 악인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항변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들이 품삯을 받고 원망하던 것과 똑같습니다(마 20:11~12). 여기 '바르다'로 번역된 '이타켄'은 본래 '저울에 달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이 고장 났다는 항의인데, 하나님은 그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십니다. 저울이 어긋난 것은 내 길이 아니라 너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 년 가까이 에스겔의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신적 공의의 단순한 논리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죄를 시인하고서도 소망의 초청에 응답하는 대신 신학적 난제에 걸려 넘어졌고, 끝내 하나님을 탓했습니다. 굳은 마음은 복음을 듣고도 트집부터 잡습니다. 은혜가 불공평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아직 공로의 저울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20절). 이 말씀이 무섭게 들립니까. 아닙니다. 문맥 안에서 이것은 소망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력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방향을 오차 없이 측정하시는 분입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행실을 바꾸면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제까지의 죄가 오늘의 돌이킴을 막지 못하고, 어제까지의 의가 오늘의 타락을 면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은 한 하나님의 두 얼굴입니다(롬 11:22). 다만 기억해야 합니다. "구속자를 거부하는 자는 심판자와 대면하게 된다. - 아이히로트" 은혜의 초청이 울리는 지금이 돌이킬 때입니다. 심판의 선언 앞에서 트집을 잡으며 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열려 있는 생명의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맺는 말
"어찌 능히 살리요"라는 영적 파산 선언이 오히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압도적 생명의 맹세를 불러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킨 자의 모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며,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방향으로 우리를 저울에 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십자가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체념의 탄식을 회개의 유턴으로 바꾸고, 미루어 둔 그 한 가지 죄의 길에서 실제로 돌이켜, "어찌 죽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추천 2~3곡)
새찬송가 276장 〈아버지여 이 죄인을〉 — 오늘의 찬송.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라는 10절의 탄식을 그대로 아버지 앞에 들고 나아가, 정죄가 아닌 용납을 구하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새찬송가 527장 〈어서 돌아오오〉 — "돌이키고 돌이키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11절)라는 하나님의 애타는 초청을 가장 직접적으로 노래합니다. 죄 짐에 눌린 자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새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16절)라는 완전한 사면이 어린양의 보혈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며 십자가 앞에 서게 합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의 기도는 죄에서 돌이키려는 회개입니까, 아니면 고통의 해소만 구하는 부르짖음입니까? "이미 늦었다"는 체념으로 하나님의 맹세("나는 네가 사는 것을 기뻐한다")를 가로막고 있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실천입니다(15절). 돌려주어야 할 것, 끊어야 할 관계나 습관, 바로잡아야 할 일 중에 오늘 실제로 '유턴'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강단과 성도의 입술에서 심판의 경고가 늘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는 아버지의 애통한 초청으로 전해지게 하시고, 체념에 빠진 영혼들이 돌이켜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 안에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는 공로의 저울을 내려놓게 하시고, 늦게 돌아온 형제를 함께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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