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에스겔 29장 17절 ~ 30장 9절
- 박정배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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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품삯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본문: 에스겔 29장 17절 ~ 30장 9절
여는 말
어제에 이어 애굽을 향한 심판 예언이 계속되지만, 오늘 본문의 첫 단락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스물일곱째 해 첫째 달 초하루"(29:17), 곧 주전 571년 4월경에 주신 말씀으로, 에스겔서에 기록된 예언 가운데 가장 마지막 예언입니다. 40~48장의 새 성전 환상보다도 이 년이나 뒤의 말씀이, 주전 587년의 예언들 사이에 끼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을 통해 열강의 전쟁과 정복까지도 당신의 손안에 있음을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 역사의 진짜 주관자가 누구신지 묵상하게 하십니다.
1. 하나님은 세상 권세도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 그 수고를 갚아 주십니다 (29:17~20)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그 대가로 내가 애굽 땅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9:20)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두로를 무려 십삼 년 동안 포위 공격했습니다. 성벽을 향해 흙과 바위를 쌓아 올리고 거대한 공성 장비를 끌어 나르는 혹독한 노역에 투구가 쓸려 "모든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무거운 짐에 "모든 어깨가 벗어졌으나"(18절), 정작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두로는 바다 위의 섬 요새였기에 마침내 항복했을 때 그 재물은 이미 배에 실려 빠져나간 뒤였고, 에스겔이 26장에서 예언했던 것 같은 완전한 파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친 참전 용사들의 불만이 바벨론에 돌아와 퍼지고, 포로들 사이에서는 "에스겔의 예언이 빗나간 것 아니냐"는 냉소가 고개를 들던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에스겔은 전에도 "날은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겔 12:22)는 백성의 조롱을 들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그 십삼 년의 수고가 사실은 "나를 위하여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자신은 제 야망을 위해 싸웠을 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두로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당신의 일을 대행한 일꾼이었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매이신 분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 위에 자유로우신 주인이시기에, 두로 대신 애굽을 그 품삯으로 지정하실 수 있었습니다. 19절에서 "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카르'는 품꾼에게 주는 품삯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왕의 군대에게조차 일한 삯을 떼어먹지 않으시고, 애굽 땅을 그 품삯으로 지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내 종"(렘 43:10)이라 부르시고, 훗날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내 기름 부음 받은 자"(사 45:1)라고까지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세상 권력자들이 자기 계산대로 움직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사용하셔서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말씀이 새벽에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고를 보고 계시고, 반드시 갚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왕의 열매 없어 보이는 십삼 년 수고까지 헤아려 대가를 챙겨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하물며 당신의 자녀가 주님을 위해 흘린 땀을 잊으시겠습니까. 우리 눈에는 실패로 끝난 것 같은 헌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섬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로 앞에서 빈손이 된 군대에게 애굽이 예비되어 있었듯이, 하나님의 장부에는 우리의 수고가 하나도 누락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는 말씀 그대로, "내 사정은 여호와께 있고 내 보응은 나의 하나님께 있다"(사 49:4)는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2. 교만한 권세에는 '여호와의 날'이 반드시 임합니다 (30:1~9)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애굽을 붙들어 주는 자도 엎드러질 것이요 애굽의 교만한 권세도 낮아질 것이라" (30:6)
30장에 들어서면 하나님은 애굽을 향해 "슬프다 이날이여" 통곡하라 하시며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십니다(2~3절). '여호와의 날'은 본래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소망을 담은 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백성을 높여 주실 날을 고대하며 부르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이 기대를 뒤집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 서 있으니 "여호와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는 것입니다. 그 후 요엘도 그날을 "어둠과 캄캄함의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욜 2:2)이라 했고, 에스겔 자신도 예루살렘을 향해 이미 그날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겔 7장).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잣대가 다시 방향을 돌려 열방에게, 특별히 스스로 태양신의 아들이라 자부하던 애굽에게 적용됩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을 향해 선포했던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원수에게 보복하시는 날"(렘 46:10)과 같은 흐름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날을 "구름의 날"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라고 말합니다. 6절의 "교만한 권세"는 히브리어로 '게온 우자흐', 곧 '그 힘이 낳은 오만'이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이 일찍이 레위기에서 불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레 26:19)라고 경고하실 때 쓰신 바로 그 표현입니다. 힘 자체가 죄가 아니라, 힘이 자라나 하나님 없이도 안전하다는 오만이 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꺾으십니다.
그날에 무너지는 것은 애굽만이 아닙니다. 구스와 붓과 룻과 모든 동맹국들, "애굽을 붙들어 주는 자"들까지 함께 엎드러집니다(5~6절). 북쪽 국경 믹돌에서 남쪽 끝 수에네까지, 우리말로 하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땅이 예외 없이 심판 아래 놓입니다. 심지어 나일강 상류에 멀찍이 떨어져 "염려 없는", 곧 스스로 안전하다 여기던 구스에게까지 하나님은 특사를 배에 태워 보내셔서 그 소식에 떨게 하십니다(9절). 이 말씀이 선포된 때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시기, 곧 유다 백성이 마지막까지 "애굽이 와서 구해 줄 것"이라는 헛된 소망을 붙들고 있던 때였습니다. 에스겔은 그 미련을 뿌리째 뽑아내야 했습니다. 구원은 애굽에서 오지 않습니다. 교만한 권세를 의지한 자는 그 권세와 함께 무너지고, 지리적 거리도 심판의 날에는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어제 본문이 애굽을 '부러지는 갈대 지팡이'라 불렀다면, 오늘 본문은 그 지팡이가 부러지는 날짜가 하나님의 달력에 이미 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 권세의 견고해 보이는 외양이 아니라, 그 위에 임할 여호와의 날을 보는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3. 심판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한 뿔이 돋아나게 하십니다 (29:21)
"그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9:21)
열강들이 무너지는 굉음 한가운데, 하나님은 조용히 회복의 씨앗 하나를 심어 두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라는 약속입니다. '뿔', 히브리어 '케렌'은 들짐승의 힘이 뿔에 모이듯 성경에서 힘과 존귀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시편에서 "내가 여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시 132:17) 약속하셨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9)라고 찬양했습니다. 당장은 포로로 끌려와 밟히고 있는 이스라엘이지만, 열강들이 차례로 꺾이는 바로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새 힘이 돋아나고, 마침내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에게서 그 약속이 만개할 것입니다. 애굽의 뿔은 꺾이는 날, 이스라엘의 뿔은 돋아나는 것입니다.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라는 말씀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사역 초기부터 하나님이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셔서 말문이 닫힌 채(겔 3:26),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하던 날 저녁, 실제로 그의 입이 열렸습니다(겔 33:21~22). 심판의 말씀이 다 이루어진 그 자리가,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아름다운 사실이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인 오늘 본문이, 예언이 빗나갔다는 냉소 앞에 서 있던 선지자에게 "너는 나의 참된 종"이라고 다시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부르실 때 그러셨듯이 보내시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변호하시고 그 입을 여십니다. 우리 삶에도 무너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과 흔드심은 끝장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 폐허 위에서 뿔이 돋고 입이 열리는 새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과정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무너짐의 자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단 하나의 지식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본문은 세 가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같은 세상 권세도 당신의 도구로 쓰시며, 열매 없어 보이는 십삼 년의 수고까지 품삯을 챙겨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둘째, 힘을 믿고 오만해진 애굽 같은 권세에는 '여호와의 날'이 반드시 임하며, 그 권세를 붙들던 자들도 함께 무너집니다.
셋째, 그 심판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시고 닫혔던 입을 여시는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하루, 흔들리는 세상 권세가 아니라 역사의 품삯을 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맡겨진 자리에서 묵묵히 수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찬양 (추천)
새찬송가 532장 「주께로 한 걸음씩」 (생명의삶 오늘의 찬송) — 흔들리는 세상 권세가 아니라 주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순례의 고백이 오늘 본문의 초청과 맞닿아 있습니다.
찬양 「하나님의 그늘 아래」 (생명의삶 경배와 찬양) — "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나 잠잠히 주를 묵상하네", 교만한 권세가 아닌 하나님 그늘 아래 거하는 삶을 노래합니다.
새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열강도 무너지는 역사 속에 오직 하나님만이 무너지지 않는 요새이심을 고백하는 찬송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열매 없이 끝난 것 같아 마음에 묻어 둔 수고가 있습니까? 그 수고를 보고 계시고 갚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오늘 그 서운함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내 힘과 이룬 것들이 '게온 우자흐', 곧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는 오만으로 자라고 있는 영역은 없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의 모든 보이지 않는 섬김—새벽을 여는 기도, 이름 없이 감당하는 봉사—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갚아 주심을 믿으며, 열매가 더디 보여도 낙심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리는 세상 권세와 소식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만 바라보며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입술이 담대히 열리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 느부갓네살의 인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를 이루어가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허용하신 세상의 권세마저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것이라 여기신다. 처음 본문을 봤을 땐,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순종의 자격을 갖췄기에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자체만 주목하면 자기 영광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을 수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다. 이 부분에서 역사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다. 묵상 에세이 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시고 당신의 목적대로” 행하신다.
반복되는 심판의 말씀을 통해 내 인생은 “나를 위하여 하였다” 이 문장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둘 것인가, 애굽과 같이 ‘나’로 둘 것인가 물으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원하는 길대로 갔을 때, 그때도…
애굽에 임한 심판의 말씀을 보게 된다. ’내가 왕이다‘ 외치는 바로의 권세 아래가 바로 애굽의 삶이라고 보여주셨다. 이번 한 주 보게하신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니 새로울 것 없이 이전에 보여주셨고, 싸우라고 주신 문제들이다. 그런데 왜 같은 문제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을까, 왜 이상하다고 느껴도 내 길을 고집할 수 밖에 없었을까… 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 것 같은 삶을 반복하게 될까… 이번 한 주 내내 말씀하신 교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주님과 너무 멀어졌고, 죄에 대해서도 더 깨어 볼 수 없었음을 돌아보게된다.
지난 7년간 문제에 대해 수 없이 들었고, 드러내주셨고 옆에서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리이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잘 모르겠다. 이쯤되면 변화될만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내가 정말 한심하게 느껴진다. 오늘 새벽 말씀 중 문제에 대해서는 분석할 수 있어도 그 문제에…
오늘 본문은 에스겔에 가장 마지막 예언으로 계속해서 애굽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대가도 없는 전쟁에 백성들은 지쳤고, 에스겔의 예언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그들의 수고는 나를 위하여 함인즉’ 이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드러내셨고,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로 인해 교만했던 애굽은 곧 멸망하게 됩니다.
애굽의 심판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에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애굽의 심판을 통해 주변 국가들도 두려워 떨게 됩니다.
저는 시야가 좁아 내 일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수고가 가장 중요하고 나를 지키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고 내가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자리에 가게 됩니다.
라케노에 일 하면서도 내 수고가 가장 커 보였기에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옳다는 주장 만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인정받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