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아가 7:1-13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본문: 아가 7장 1절 ~ 13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아가 6장에서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멀리 있는 줄 알았던 사랑하는 이가 자기 동산에 가까이 있었고, 여인은 다시 서로에게 속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6장의 끝에서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오늘 7장은 그 외침에 대한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구경거리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가 입을 열자 전혀 다른 노래가 시작됩니다. 생명의 삶은 오늘 본문에 "은혜의 시선과 기쁨의 동행"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가에 있는 세 번의 신체 찬미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긴 노래가 오늘 울려 퍼지고, 그 끝에서 여인은 아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 하나를 남깁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한 주간의 끝자락, 나를 바라보시는 그 시선 앞에 함께 서기 원합니다.
1. 발끝에서 머리까지, 숙련공의 작품 (7:1~6)
"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아 7:1~6)
노래가 발에서 시작합니다. 아가에는 사랑하는 이의 몸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찬미하는 노래가 여러 번 나오는데, 다른 노래들은 모두 머리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갑니다. 4장에서도 신랑은 눈과 머리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노래만 발끝에서 시작해 머리로 올라갑니다. 바로 앞 절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여인을 보자고 청했기 때문입니다. 춤은 발에서 시작됩니다. 발의 움직임 없이 춤은 없습니다. 춤추는 여인의 발끝에 머문 시선이 넓적다리와 허리와 목과 눈을 지나 머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개의 시선이 갈라집니다.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던 구경꾼들의 시선이 있습니다. 여인을 공연자로 세우고, 몸을 구경거리로 삼는 눈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시선이 있습니다. 같은 몸을 보지만 하나는 소비하고, 하나는 존귀하게 합니다. 그의 첫마디가 "귀한 자의 딸아"입니다. 이어지는 찬미 전체가 한 고귀한 여인을 향한 경의임을 첫머리에 새긴 것입니다.
그 시선이 노래하는 그림들을 보십시오. 섞은 포도주가 가득히 넘치는 둥근 잔, 백합화로 두른 밀단. 술과 곡식, 잔치와 풍요의 그림입니다. 사랑의 기쁨이 언제나 채워지고 흘러넘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목은 상아 망대,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입니다. 목이 망대를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망대의 웅장함과 위엄과 든든함을 그녀에게 입히는 말입니다. 눈은 헤스본 연못입니다. 물이 귀한 땅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저수지는 아름다움이자 그 성읍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는 갈멜산, 머리털은 왕의 옷을 물들이던 자줏빛입니다. 헤스본에서 레바논으로, 다메섹에서 갈멜까지. 한 사람의 몸이 이스라엘 땅 전체처럼 펼쳐집니다. 사랑하는 이의 눈에 그녀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6절에 이르면 비유가 사라집니다. 더 이상 견줄 것이 없어서, 직접적인 외침만 남습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1절에 열쇠가 되는 낱말이 하나 있습니다. '숙련공'입니다.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는 드문 말입니다. 그녀의 몸은 숙련공의 손이 만든 작품입니다. 이 찬미는 결국 그 몸을 지으신 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아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조용히 현존하십니다. 몸은 부끄러운 것도 상품도 아닙니다. 지으신 분의 작품입니다.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4~5)
신약은 이 진리를 구원받은 성도에게 이렇게 적용합니다.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우리는 자기를 미워하는 시대를 삽니다. 화면 속의 몸과 비교하고, 세상의 잣대로 점수를 매기고, 거울 앞에서 한숨짓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와 상관없이, 우리를 존귀와 기쁨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시선입니다.
그리고 이 시선은 우리가 서로를 보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자를 향해, 자녀를 향해, 지체를 향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평가와 비교입니까, 아니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입니까. 서로의 유일함을 소리 내어 말해 주는 것이 사랑의 샘을 새롭게 합니다.
2.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7:7~10)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 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 7:7~10)
찬미는 갈망이 됩니다. 신랑은 그녀를 종려나무에 견주고, 그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잡겠다고 말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온전히 함께하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아가는 부부의 사랑 안에 있는 이 갈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9절 한가운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목소리가 바뀝니다. 신랑이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라고 운을 떼자, 신부가 그 말을 받아 곧바로 이어 갑니다.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포도주가 잔에서 잔으로 이어지듯, 사랑의 말이 한 입에서 다른 입으로 끊이지 않고 흐릅니다. 사랑은 한 사람의 독백이 아니라 두 사람의 이중창입니다. 한쪽만 노래하는 사랑은 아직 절반입니다.
그리고 10절, 오늘 본문의 심장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사모하다'로 옮긴 이 말은 간절한 이끌림, 열망이라는 뜻의 테슈카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 단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창세기의 두 곳입니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6)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보십시오. 창세기에서 이 낱말 곁에는 언제나 '다스림'이 있었습니다. 타락 이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원함과 지배가 뒤엉켰고, 죄는 가인을 원하여 삼키려 했습니다. 원함이 있는 곳에 힘겨루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가 7장 10절에서 같은 낱말이 전혀 다른 관계 안에서 울립니다. 여기에는 다스림이 없습니다. 속함과 사모함만 있습니다. 타락에서 일어난 일은 사랑이 권력과 손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여인은 상대를 쥐고 흔들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자기를 향한 그의 갈망을 그저 기뻐하며 환영합니다.
고백의 변화도 보십시오.
2장에서 여인은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어제 6장에서는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입니다.
소유의 언어가 갈망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내 것이라고 붙잡는 대신, 그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에 평안히 안깁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움켜쥐는 손이 펴집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무로 거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뻐하시고 원하셨습니다.
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관계에서 "누가 이기나"를 내려놓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교회 안에서, 다스리려는 자리에서 내려와 서로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확신 가운데 여인이 헌신을 결단했듯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는 기꺼이 자신을 드립니다.
3. 가자, 들로 —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 (7:11~13)
"11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아 7:11~13)
이제 여인이 앞장섭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기억나십니까.
2장에서는 남자가 벽 너머에서 불렀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그때 여인은 집 안에 있었고, 남자가 산을 넘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인이 같은 말로 그를 부릅니다. 부름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힘의 역전이 아닙니다. 균형입니다. 받기만 하던 사랑이 자라서,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랑이 된 것입니다. 아가에서 도시는 소외의 자리였고 들과 시골은 친밀함의 자리였습니다. 들로 가자는 말은 둘만의 깊은 사귐으로 가자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처음 사람을 들로 불러낸 이는 가인이었습니다.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8)
가인은 죽이려고 들로 불러냈습니다. 아가의 여인은 사랑하려고 들로 부릅니다. 같은 들, 같은 초대의 말이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미움과 소외의 역사가, 사랑의 노래 안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두고 부른 또 하나의 노래가 성경에 있습니다.
"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 5:1)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는 슬프게 끝났습니다. 사랑을 쏟았으나 들포도가 맺혔습니다. 그러나 아가의 포도원은 움이 돋고 꽃술이 퍼지고 석류꽃이 핍니다. 그리고 그 꽃 핀 자리에서 여인이 약속합니다.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자기 포도원에서 거두기 원하시는 열매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 새것과 묵은 것은 모든 것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갓 맺은 사랑의 설렘과 오래 익은 사랑의 깊이, 그 전부입니다. '쌓아 두다'는 보물처럼 깊이 간직하다라는 말입니다. 여인은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아껴 두었다가, 이제 아낌없이 꺼내 놓습니다. 받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먼저 이끌고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한 집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하나님과 관계가 어떠세요?" 물었더니,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이야기해 보니 최근에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구하지 않았으니 응답받은 일도 없었고, 거절당한 일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거절당한 적이 없기에 친밀하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부부가 각방을 쓰면서 대화도 하지 않고 싸우지도 않는다고 해서, 그 부부의 관계가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한 사랑은 사랑받는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먼저 찾고, 먼저 말을 걸고, 먼저 들로 가자고 초대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여전히 수동적인 자리에 앉아만 있다면, 그 사랑은 아직 7장까지 오지 못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고, 시간과 마음과 삶의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내어 드리는 것. 그것이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라고 고백하는 신부의 자리입니다.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구경꾼들은 "보게 하라" 외쳤지만 사랑하는 이는 발끝에서 머리까지 존귀의 언어로 노래했습니다. 그 찬미 앞에서 여인은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고백했고, 이제 쌓아 둔 모든 것을 들고 "가자, 들로" 먼저 초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주님은 숙련공의 눈으로 나를 보십니다. 그 은혜의 시선이 나의 가치입니다.
둘째, 그분이 나를 사모하십니다. 다스림의 언어가 사모함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셋째, 사랑은 받는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쌓아 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며 함께 갑니다.
그리고 이 노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원함 곁에 늘 다스림이 있던 이 세상에서, 다스릴 권세를 가지신 그분만이 그 권세를 내려놓으셨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모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밤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눅 22:15)
원하고 원하였노라. 죄인과 한 상에 앉기를 그토록 사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사랑에서 결코 정신을 차리고 자기 보호를 위해 물러나지 않으신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남은 상처가 그 증거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분이 먼저였습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성경을 지성으로만 아는 사람의 삶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의 삶은 근본부터 다르다."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은 다릅니다. 그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신부처럼 응답합니다. 자기의 새것과 묵은 것,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쌓아 두고, 먼저 그분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에, 어제 새벽 우리가 함께 바라보았던 그 단장한 신부가 서 있습니다.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입니다(계 21:2).
오늘의 찬송이 새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입니다. 이슬 맺힌 동산에서 주님과 단둘이 거닐며 음성을 듣는 동행의 찬송입니다. 들로, 포도원으로 함께 가자던 오늘 본문의 초대가 이 찬송 안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를 사모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내가 속한 분 예수"를 노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 오늘의 찬송.
동산에서 주님과 단둘이 동행하며 나누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11절)의 초대와 맞닿습니다. 새벽을 여는 찬송으로.
〈그 사랑 얼마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6절) 나를 아름답다 하신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돌려 노래합니다. 묵상의 자리에서.
새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자격 없는 나를 존귀와 기쁨의 시선으로 보시는 은혜(1~6절)에 대한 응답입니다. 결단의 자리에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는 신랑의 시선에는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사랑의 주님 앞에서 오늘 내려놓아야 할 부정적인 자아상은 무엇입니까?
여인은 가장 좋은 것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쌓아 두었다가 내어 놓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쌓아 둔 것, 기꺼이 내어 드릴 열매는 무엇입니까?
받기만 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함께 가자" 초대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서로를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가와 비교의 말 대신 존귀히 여기는 말을 나누게 하소서.
받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먼저 찾고 먼저 내어 주는,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조차 알아보지 못한 제 가치를 인정해 주시고 아름답다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가 아닌 주님의 시선과 사랑으로 저 자신을 보며 삶이 회복되게 하소서.
주님과의 사랑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게 하시고, 사랑의 열매를 공동체 안에서 나누게 하소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