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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아가 6:1-13

2시간 전
8분 분량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본문: 아가 6장 1절 ~ 13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아가 5장의 어긋남의 밤을 함께 걸었습니다. 문을 열었을 때 사랑하는 이는 벌써 물러갔고, 여인은 밤거리에서 매 맞고 겉옷을 빼앗기면서도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묻는 예루살렘 딸들 앞에서, 사랑하는 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증언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증언을 들은 딸들이 움직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생명의 삶은 오늘 본문에 "사랑의 언어로 회복되는 사랑의 확신"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잃어버린 것 같던 밤이 재회와 확신의 아침으로 바뀌는 장입니다. 상실의 노래가 어떻게 회복의 노래가 되는지, 오늘 목요일 새벽에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6:1~3)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 6:1~3)


딸들의 말이 달라졌습니다. 어제 5장에서 그들은 "네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다소 냉담하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사랑하는 이를 온 마음으로 그려 보이자 태도가 완전히 바뀝니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같은 물음을 형태만 바꾸어 두 번 묻습니다. 궁금함이 그만큼 간절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방관자에 지나지 않던 딸들이 신부의 사랑 고백에 감화되어 함께 찾아 나서는 동역자로 변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증언이 곁에 선 이들의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가에서 동산과 향기로운 꽃밭은 친밀함과 생명과 언약적 사랑의 공간입니다. 그러니 이 대답은 이런 고백입니다. 그는 나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우리의 사랑 안에 계셨다. 어젯밤의 부재는 버림이 아니었습니다. 찾아 나선 그 길 끝에서 여인은 깨닫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정말로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3절, 이 장의 심장이 뜁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원문은 전치사 하나로 지극히 간결합니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그런데 이 고백, 처음이 아닙니다. 2장 16절에서 이미 했던 고백입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혔습니다.

2장의 고백 :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 그가 먼저

6장의 고백 :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 내가 먼저

상실과 탐색의 밤을 지나고 나니, 내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이 앞자리로 나왔습니다.


사랑이 위기를 통과하며 성숙한 것입니다. 언약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은 단순히 사랑하는 이를 찾았다는 보고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정체성의 고백입니다. 주님과 연합하고 이를 굳게 붙드는 성도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립니다. 세상의 질문과 흔들림 앞에서 우리가 먼저 꺼낼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7~8)



2. 육십, 팔십, 무수 — 그러나 하나뿐 (6:4~10)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 6:4~10)


다시 만난 신랑의 입에서 둘째 찬미가 쏟아집니다. 디르사는 북 왕국의 수도였고 예루살렘은 남 왕국의 수도입니다. 남과 북의 가장 화려한 두 왕도를 신부에게 입힌 것입니다. 그런데 디르사라는 이름은 '기뻐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기쁨, 흡족함, 아리따움. 그러니 이 찬미는 화려한 도시에 빗댄 것만이 아니라, 그 이름의 뜻 그대로 "너는 기쁨 그 자체같이 아리땁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이 이어집니다.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구나." 사랑의 노래에 군대가 나옵니다. '당당한'으로 옮긴 말은 '두려운, 경외로운'이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이 말이 쓰인 다른 자리는 갈대아 군대를 묘사할 때뿐입니다. 신부의 아름다움은 곱고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전열을 갖추고 깃발을 세운 군대처럼 바라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신랑이 외칩니다.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사람을 두려움으로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헌신뿐 아니라 떨림도 일으키는, 날이 선 아름다움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압도하는 존재입니다. 오래된 부부, 오래된 신앙의 병은 이 경외를 잃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랑은 관리가 됩니다.

이어지는 머리털, 이, 뺨의 찬미는 4장에서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위기의 밤을 지나고도 사랑의 말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처음 본 것처럼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9절, 이 장의 중심입니다. 왕비가 육십, 후궁이 팔십, 시녀는 셀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숫자가 커질수록 이름이 사라집니다. 셀 수 없는 시녀들이란 결국 얼굴 없는 무리입니다. 왕궁은 사람을 집계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수가 하나로 줄어들 때 비로소 이름이 불립니다. '완전한 자'로 옮긴 말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라 할 때 쓰인 그 말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을 유일하고 흠 없는 자로 여기는 시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도 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7~8)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9절 뒷부분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그녀를 귀중히 여기고, 여자들이 복되다 하고, 왕비와 후궁들까지 그녀를 칭찬합니다.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이들까지 함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복되다 하다"와 "칭찬하다"가 함께 나오는 곳이 구약에 한 군데 더 있는데, 현숙한 여인을 노래하는 자리입니다.

"28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잠 31:28~29)

진정한 사랑은 보는 이들에게도 감동을 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세워 주는 사랑으로 확장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들이 너무 힘들 때 "내가 그 여자와도 사는데 뭘 못하겠어?" 하고, 아내들도 "내가 그 인간도 사람 만들었는데, 뭘 못하겠어?" 한다는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남편이건 아내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자도 받으셨는데, 내가 누군들 못 받겠어?" 숫자로 사람을 세는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만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칭찬해 주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의 사랑방이기를 바랍니다.



3. 부지중에 —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6:11~13)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아 6:11~13)


호도 동산, 곧 호두나무 정원으로 내려갑니다. 호두나무는 이 땅에 저절로 자라는 나무가 아니어서, 외래 나무를 들여와 가꾼 특별한 정원, 아마 왕실 정원이었을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봄을 살피러 가는 이 산책은 실은 사랑의 결실과 기쁨을 그려 보는 설렘의 걸음입니다.

그런데 12절, 아가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로 꼽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석가들이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의 하나로 꼽을 만큼 번역이 갈립니다. 그러나 번역이 갈려도 정서는 분명합니다. "부지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소유한 채 동산으로 내려간 사람이, 사랑에 사로잡힌 채 돌아옵니다. 사랑은 계산과 관리를 넘어서는 힘입니다.


어느 주석가가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의 진짜 문제는 정신을 너무 늦게 차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린다는 것 자체라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상식'이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광기'를 질식시킨다는 것입니다. 친밀함은 날마다 돌보아야 하는 연약한 식물입니다. 계산하는 사랑으로는 그 식물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한 낱말이 네 번 울리는 곳은 아가에서 이 구절뿐입니다. 떠나려는 신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람미'라는 호칭이 나오는데, 솔로몬, 그리고 샬롬과 철자가 겹치는 말입니다. 평화롭고 온전한 신부라는 이미지가 배어 있는 이름입니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이라는 뜻이면서,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 32:1~2)

그런데 이 부름에 반문이 맞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보려는 시선과, 그 시선을 문제 삼는 물음입니다. 바라봄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을 보아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시선이 있고, 축복하며 세워 주는 시선이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누구의 시선 아래 설 것인가입니다. 세상의 평가하는 눈이 아니라,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라 불러 주시는 분의 시선에서 정체성을 받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심은 사람의 보는 것과 다릅니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사랑은 여인의 외모를 바꾼 것이 아니라, 지닌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세상의 시선과 평가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담대히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증언에 감화된 딸들이 함께 찾아 나서고, 여인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신랑은 두 왕도와 군대의 위엄으로 신부를 노래하다가 "육십, 팔십, 무수하되 — 하나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부지중에 사로잡히는 사랑과, 술람미를 향한 뭇 시선 앞의 물음을 보았습니다.

소속, 하나뿐, 사로잡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사랑은 소속의 고백입니다. 흔들리는 날일수록 먼저 고백합시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집계하지 않습니다. 무수한 무리 속에서도 "너는 하나뿐"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사랑은 사로잡힙니다. 계산하고 관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어디에서 완성됩니까.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낮은 차원의 존재는 스스로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에, 높은 차원의 존재가 먼저 다가와야만 관계가 시작됩니다. 키 작은 아이가 어른과 눈을 맞출 수 없으니 어른이 자세를 낮추듯, 성자 예수님은 영원한 천상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미천한 우리를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로 데려가신다니, 이것이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분은 우리를 집계하지 않으시고 이름을 부르십니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3)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 15:4)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하나를 찾으시는 분에게, 우리는 백 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뿐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정신을 차리지 않습니다. 자기 보호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갑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신랑은 신부를 "예루살렘같이 곱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비유가 뒤집힙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단장하고 내려옵니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주님은 우리를 그 신부로 단장시켜 가십니다. 성도가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교제는 그가 주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표가 됩니다. - 매튜 헨리


오늘의 찬송이 새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우리를 "하나뿐"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이 새벽 우리도 "주님도 한 분뿐입니다"라고 응답하며 하루를 열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 오늘의 찬송.

"나의 참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9절 "하나뿐이로구나"에 대한 성도의 응답입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주님 한 분 밖에는〉

육십, 팔십, 무수 가운데 "하나뿐"(9절)이라 하신 주님께 "주님 한 분 밖에는 없네" 고백하는 곡입니다. 결단의 자리에서.



새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3절), 상호 귀속의 고백이 주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의 찬송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발견한 '동산'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내가 주님께 속했고, 주님이 내 편이시라는 사실은 내게 어떤 소망을 주나요?



솔로몬은 다시 만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어떤 비유로 묘사했나요?

내가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격려하고 세워 줄 이는 누구인가요?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흔들리는 날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라고 먼저 고백하게 하소서.

숫자로 사람을 세는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세워 주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를 '사랑하는 자'라 불러 주시며 주님과 연합을 이루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두려움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저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따뜻한 시선으로 가정과 공동체 구성원들을 바라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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