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아가 4:1-16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본문: 아가 4장 1절 ~ 16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아가서 3장을 보았습니다. 밤에 침상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성안을 헤매다 마침내 만난 여인이 있었고, 거친 들에서 연기 기둥처럼 올라오는 솔로몬의 가마, 혼인 행렬이 있었습니다.
오늘 4장은 그 혼인 행렬 바로 다음에 놓인 노래입니다. 생명의 삶은 오늘 본문에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사랑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신랑이 처음으로 "내 신부야" 부르며, 신부의 아름다움을 머리부터 차례로 노래합니다.
고대 혼례에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묘사하며 노래하는 형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1절부터 7절이 바로 그런 찬미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나와 함께 가자"는 부름으로, 다시 "잠근 동산"의 노래로 이어집니다. 찬미, 부름, 그리고 열리는 동산. 어제처럼 먼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노래로 듣고, 그 사랑에 비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1. 눈에서 시작하는 사랑의 노래 (4:1~7)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아 4:1~7)
노래는 눈에서 시작합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머리나 키가 아니라 눈입니다. 눈을 들여다보는 것은 단지 몸이 아니라 한 인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에게 그녀는 많은 여자 중 하나가 아니라, 눈을 마주 보아야 할 단 한 사람입니다.
비유들이 오늘 우리 귀에는 낯섭니다. 머리털이 염소 떼 같고, 이가 털 깎인 암양 같다니요. 그러나 이 비유들은 생김새를 그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가치를 옮겨 담는 그릇입니다. 검은 염소 떼가 산기슭을 흘러내리는 모습은 풍성하게 물결치는 머릿결입니다. 갓 씻겨 올라온 털 깎인 암양은 희고 깨끗하다는 말이고, "각각 쌍태를 낳은 양"은 하나도 빠지거나 상한 것 없이 가지런히 짝을 이루었다는 강조입니다. 홍색 실 같은 입술은 가늘고 정교한 선과 생기 있는 붉은빛입니다. 다윗의 망대 같은 목은 목이 길다는 말이 아니라 곧고 당당한 위엄입니다. 망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지키시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켜져서 안전한 사람, 아무에게도 주눅 들지 않는 사람. 그가 그녀를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찬가는 7절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하나하나 세던 노래가 마지막에 "너는", 곧 네 전부를 싸안습니다. 묘사된 부분만이 아니라 묘사되지 않은 부분까지, 그의 눈에 신부는 티 없이 온전합니다. 사랑의 언어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전인적으로 인정하고 기쁘게 받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 주시고, 은혜 안에서 아름답게 바라보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평가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사 43:4)
"주님이 내 앞에 계셨는데,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어서 주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의 평가와 시선에 마음을 빼앗겨 나를 잃어버리는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의지할 때 비로소 내가 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배워, 배우자와 자녀와 지체에게 평가와 비교가 아니라 눈을 마주 보는 긍정의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2. 내 신부야, 나와 함께 가자 (4:8~11)
"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아 4:8~11)
여기서 처음으로 "내 신부야"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아가서 전체에서 이 말은 오늘 본문 언저리에만 집중해서 나옵니다. "누이"가 가깝고 살가운 사이를 나타내는 다정한 애칭이라면, "신부"는 언약의 말입니다. 이 호칭과 함께 이 동행의 부름에 언약의 무게가 실립니다.
레바논, 아마나, 스닐, 헤르몬. 눈 덮인 높은 산맥이요, 사자 굴과 표범 산이 있는 험하고 먼 곳입니다. 신부가 실제로 그 산꼭대기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가 내 팔 안에 있지 않으면, 지구의 가장 먼 모퉁이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지명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되는 한마디, "나와 함께"에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안온한 자리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험한 길이라도 손잡고 함께 나서는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그녀를 "신부"라 부릅니다. 그런데도 끌고 가지 않고 청합니다. "나와 함께 가자. 내려오너라." 친밀함은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녀의 온전함을 존중하며 구애할 때, 그녀가 자유롭게 함께 가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결혼의 흔한 병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면 구애가 그칩니다. 아가는 반대로 노래합니다. 혼인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청하는 사람입니다. 구애는 결혼의 서곡이 아니라 결혼이 계속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호 2:14)
끌고 가지 않으시고 타이르시는 하나님, 말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9절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원어로는 "네가 내 심장을 사로잡았다", "내 심장을 뛰게 하였다"입니다. 그것도 눈길 한 번, 목걸이의 구슬 한 꿰미 때문에 말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상대의 작은 몸짓 하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스치는 눈길 한 번이 온 하루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10절은 귀에 익은 말입니다. 1장에서 여인이 그에게 했던 말,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이제 그 말을 남자가 그대로 그녀에게 돌려줍니다.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참사랑은 한쪽만 찬미하지 않습니다. 받은 말을 돌려주고, 서로를 높이는 상호의 사랑입니다. 11절의 "네 의복의 향기"도 그렇습니다.
혼인날의 옷에서 나는 향기입니다. 그의 눈에 신부의 평상복이 혼례복처럼 향기롭습니다.
3. 잠근 동산이 열릴 때 (4:12~16)
"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 풀과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아 4:12~16)
오늘 본문의 중심 이미지입니다.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동산과 우물과 샘은 본래 생명과 풍요가 넘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잠기고 봉인되어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동산이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배타적인 소중함입니다. 참된 사랑은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귀한 이를 위해 지켜 둡니다. 사랑은 헌신으로 시작하고, 그것 없이 진실한 사랑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모두에게 열린 것"을 자유라 부릅니다. 그러나 아가는 한 사람을 위해 잠긴 것이 가장 풍성하다고 노래합니다.
부부간의 긴밀한 사랑은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며, 언약 안에서 소중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청년에게 순결은 금지가 아니라 동산을 지키는 일이고, 부부에게 경계는 사랑을 가두는 벽이 아니라 생수를 지키는 우물의 돌담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그런데 그 잠긴 동산 안을 보십시오. 석류나무와 고벨화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 13절의 원문에는 '파르데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담을 둘러 지키는 왕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후대에 '낙원'을 뜻하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어떤 정원에도 이 모든 향품이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처럼, 모든 귀한 것이 한자리에 다 있습니다. 그의 눈에 신부는 세상 끝의 향기를 다 모은 낙원입니다.
그리고 15절. 잠긴 동산인데 "생수의 우물"입니다. 잠긴 것은 고인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새 물이 솟는 우물,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입니다. 지켜지는 사랑이야말로 마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생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마지막 16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하는 사람이 바뀝니다. 신부가 노래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굳게 잠겨 있던 동산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산을 여는 주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자신입니다. 잠긴 동산은 억지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이 사랑으로 스스로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동산"을 이내 "그의 동산"으로 바꾸어 부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내 것을 그의 것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입니다. 지켜진 사랑이 언약 안에서 마침내 열릴 때, 그 자리는 다름 아닌 낙원이 됩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신뢰하지 못해 마음을 내어 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 "나의 동산"으로 잠가 둔 삶의 영역이 있습니까. 내 시간, 내 재정, 내 상처, 내 계획. 주인이 스스로 열 때에만 열리는 문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눈에서 시작해 "아무 흠이 없구나"로 맺는 찬가. 이미 신부인데도 "나와 함께 가자" 청하는 구애. 그리고 잠근 동산이 스스로 열려 "나의 동산"이 "그의 동산"이 되는 내어 줌.
오늘 우리가 붙들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사랑은 눈을 마주 보고 "흠이 없다" 말해 줍니다. 주님은 세상의 평가와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둘째, 사랑은 강요하지 않고 "나와 함께 가자" 청합니다. 혼인한 뒤에도 구애는 그치지 않습니다.
셋째, 잠근 동산은 주인이 스스로 열 때 낙원이 됩니다. 지켜진 사랑이 언약 안에서 열릴 때 생수가 흐릅니다.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3주 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은 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이혼의 아픔을 겪은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인 세 명이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에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깊은 우울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의 조건 없는 섬김과 돌봄을 통해 그는 삶의 흐름을 되찾았고, 주님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에세이는 이렇게 맺습니다. 이것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노래의 신랑은 한 분을 가리킵니다. 아가의 연인은 신부에게서 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랑은 흠 많은 우리를 씻어 흠이 없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값은 자신의 흠 없음이었습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2)
그분은 생수의 근원이시면서,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 청하셨습니다. 강요하지 않으시고, 물 한 그릇을 구하시며 마음의 문 앞에 서셨습니다.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그리고 잠긴 동산의 노래는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완성됩니다. 닫혔던 낙원이 다시 열리고, 생명수의 강이 흐릅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흠 없는 어린 양이 우리를 흠 없는 신부로 세우십니다. 오늘 그 사랑 앞에서 "나의 동산"을 "주님의 동산"으로 열어 드리는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299장 〈하나님 사랑은〉 — 오늘의 찬송.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사랑 내 맘에 부어 주시사 충만케 하소서." 7절의 "아무 흠이 없구나", 그 온전한 사랑을 내 마음에 채워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1절).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불러 주는 축복의 노래입니다. 서로를 향해 부르는 자리에서.
새 311장 〈내 너를 위하여〉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 너 무엇 주려나." 흠 없는 어린 양의 사랑 앞에서, "나의 동산"을 "그의 동산"으로 내어 드리는 응답의 찬송입니다. 결단의 자리에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솔로몬은 왜 신부를 아무 흠이 없는 존재로 극찬했을까요?
세상과 달리, 주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나는 왜 세상의 평가와 시선에 마음을 빼앗길까요?
신부가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으로 비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가정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거룩함을 지켜 가고 있나요?
아직 "나의 동산"으로 잠가 둔 채 주님께 열어 드리지 못한 영역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서로를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흠이 없구나" 하고 긍정하는 말로 서로의 상처를 싸매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부부와 가정이 잠근 동산을 지키며, 그 안에서 생수처럼 흐르는 풍성함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귀히 여겨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절대적인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의 순결한 신부답게 살아가게 하소서.
욕망에 사로잡혀 무책임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사랑을 소중히 가꾸며 그 향기를 전하는 가족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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