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아가 1:1-17
노래 중의 노래
본문: 아가 1장 1절 ~ 17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역대상의 마지막 장면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상 29:28). 9월에 "아담"이라는 한 이름으로 시작한 역대상 새벽 여정이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즉위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솔로몬의 이름이 붙은 책이 열립니다. "솔로몬의 아가라." 성전을 위해 금과 은과 백향목을 모으던 이야기에서, 이제 사랑을 노래하는 책으로 넘어갑니다.'
솔직히 아가서는 새벽 강단에서 쉽게 펼치는 책이 아닙니다. 입맞춤, 향기름, 침상… 처음 읽으면 낯설고 어색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먼저 함께 붙들려 합니다.
묵상 에세이의 글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마치 시각 장애인이 손으로 더듬어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 성경이 밝히는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 그러나 그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설명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사랑이기에, 성경은 그 사랑을 노래로 부릅니다. 그 노래가 오늘 시작됩니다.
1. 노래 중의 노래 (1:1~4)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 1:1~4)
"아가"의 원어는 쉬르 하쉬림, '노래들 중의 노래'입니다. '지성소'가 거룩한 것들 중의 거룩한 것이고 '만왕의 왕'이 왕들 중의 왕이듯, 가장 뛰어난 노래라는 최상급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모든 노래 가운데 가장 좋은 노래다."
그런데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에는 시편 같은 위대한 찬양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이 사랑 노래가 "노래 중의 노래"입니까. 이 사랑이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제목의 '아'(雅)도 우아하다, 바르다는 뜻입니다. 이 노래에 담긴 사랑은 천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고귀하고 정결한 것입니다.
"솔로몬의"라는 말도 한 가지 뜻만은 아닙니다. 솔로몬이 지은 노래일 수도, 솔로몬에게 바친 노래일 수도, 솔로몬에 관한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 안에서 솔로몬은 한 번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솔로몬의 이름이 이 노래를 성경의 지혜 전통 안에 단단히 묶어 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세상의 연애시로 떨어지지도 않고, 사랑의 육체성을 지워 버리는 영적 비유로 날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 노래를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먼저 문자 그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읽습니다. 이것이 닻입니다. "본문의 문자적 의미라는 닻이 없으면, 풍유라는 배를 원하는 대로 몰고 다니며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피해 가기가 너무 쉬웠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혼인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1~32)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2)
"우리는 오직 한 배우자, 오직 한 하나님만 가질 수 있다."
혼인을 깊이 알수록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 깊이 압니다. 다만 그 무게는 조금씩 다르게 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읽는 것은 정당하되 절제해야 할 두 번째 의미라고 보기도 하고, "문자적 해석과 풍유적 해석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도 하고, 이 사랑이 "그 너머에 놓인 더 큰 사랑을 가리키는 길잡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 하나님이 지으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 본문의 닻
그 위에 :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 — 정경이 비추는 빛
그러나 : 구절 하나하나가 아니라, 장면 전체의 사랑으로
노래는 설명 없이 여인의 첫마디로 곧장 시작됩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이미 시작된 사랑의 한복판에서 열리는, 시작 없는 시작입니다. 사랑은 여인의 능동적 갈망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한 번에 한 걸음이 없고, 오히려 불세례가 있다!"
2절의 "네 사랑"은 복수형입니다. 사랑이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다정함 하나하나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3절에는 말놀이가 숨어 있습니다. '이름'은 쉠, '기름'은 쉐멘. 향기름을 쏟으면 온 방에 향이 퍼지듯,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부르기만 해도 그가 곁에 있는 듯 향기가 됩니다.
그리고 4절.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여기서 "왕"은 그녀의 눈에 비친 연인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다. 그녀의 눈에 그는 왕, 그녀 삶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다."
원문의 순서는 "나를 이끌라"가 먼저입니다. 이끌림을 구하는 이 말은 폭력이 아니라 힘 있게 끌어당기는 움직임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이끄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호 11:4)
눈여겨볼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나를"로 시작한 고백이 곧 "우리가"로 바뀝니다.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한 사람이 누리는 사랑의 기쁨이 함께하는 이들의 기쁨으로 번집니다.
2. 검으나 아름다우니 (1:5~8)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같이 되랴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 1:5~8)
5절에서 여인의 말이 방향을 바꿉니다. 연인에게 하던 고백이 "예루살렘 딸들아"로 넘어갑니다. 입맞춤도 향기도 둘만의 것이었지만, 겉모습은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랑으로 시작한 말이 금세 걱정으로 바뀝니다.
게달은 검은 염소 털로 장막을 짓던 광야 유목민입니다. 여인은 그을린 자신을 그 장막에 비깁니다. 이 검음은 타고난 피부색이 아닙니다. "내가 햇볕에 쬐어서." 노동에 그을린 것입니다. 도시의 하얀 얼굴들 사이에서 그것은 고된 삶의 표지였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검다"를 "죄"로 읽을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고와 상처, 그리고 남의 시선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포도원"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오빠들에게 떠밀려 집안의 포도원을 지키느라 정작 자기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자기 몸 하나 챙기지 못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말합니다. "검으나 아름다우니." 원문은 "나는 검다. 그리고 아름답다"로도 읽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꾸며 낸 모습으로 서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여인은 연인에게 묻습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직역하면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그녀가 자기 사랑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다른 목자들의 양 떼 사이를 헤매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방황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그리고 8절, 남자의 첫 대답이 나옵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아가에서 "어여쁘다"는 말이 처음 나오는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녀가 흔들린 바로 그 자리입니다. 남들이 흘겨보던 그 얼굴을 그는 어여쁘다 부릅니다. 대답의 형식도 그녀의 질문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묻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 주는 것, 그것이 마음이 맞닿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그녀가 불안해하는 그 지점에서 사랑을 더 크게 말해 줌으로써 그녀를 다시 세웁니다.
사람의 시선 : 그을렸다, 흘겨본다
사랑의 시선 :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한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의 안수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지만 해결되지 않는 열등감에 늘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스바냐서를 읽다가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뻐하고 반기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웃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3.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1:9~17)
"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12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아 1:9~17)
9절의 "내 사랑아"는 라에야티, 문자적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짝'입니다. 나란히 걷는 벗이요 동반자라는 말입니다. 참된 사랑은 서로에게 벗이 되어 주는 데서 완성됩니다.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오늘 우리 귀에 낯선 칭찬입니다. 바로의 병거에 매인 말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말이었습니다. 원문의 "준마"는 암말입니다. 수말들이 끄는 병거 대열 한가운데 암말 한 마리가 나타나면 모든 시선이 그리로 쏠립니다. "그녀가 모든 남자를 사로잡고, 그 자신도 정신을 잃게 만든다." 자신을 '게달의 장막'이라 했던 여인을 그는 '바로의 준마'라 부릅니다.
여인은 향기로 화답합니다. 인도에서 온 값비싼 나도 기름, 몰약 향주머니, 그리고 엔게디의 고벨화. 향은 점점 소박해지는데 거리는 점점 가까워집니다. 엔게디는 사해 서쪽 광야 한가운데 샘이 솟는 오아시스이고, 고벨화는 친구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13절을 원문대로 살리면 "몰약 향주머니 같은 내 사랑은 내 품에서 밤을 지낸다"입니다. 잠시 스쳐 가는 향이 아니라 밤새도록 품고 지내는 향. 사랑하는 이를 한시도 떼어 놓지 않는 친밀함입니다. 이런 친밀함은 정결하고 한 사람만을 향한 언약 안에서 비로소 온전한 아름다움이 됩니다.
전통적으로는 이 구절을 두 가슴은 구약과 신약, 그 사이의 향주머니는 그리스도라고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짜 맞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가에는 이것이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여인의 가장 깊은 열망보다 더 큰 무엇을 뜻한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장면 전체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을 가슴 가까이 품는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구절이 아니라 사랑 전체가 말하는 것입니다.
15~16절, 같은 말이 오고 갑니다. 원문에는 "보라"가 두 번 들어 있습니다. "보라, 너는 어여쁘다. 보라, 너는 어여쁘다." 그가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여인은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줍니다.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사랑은 어느 한편이 주고 다른 편이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를 향해 갈망하고 서로를 아름답다 부르는 관계, 지배가 아니라 조화입니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방 안의 침대가 아니라 싱그럽게 우거진 푸른 초목입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백향목과 잣나무를 들보와 서까래 삼은 숲이 두 사람의 신방이 됩니다. 사랑은 화려한 곳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함께 있는 그 자리를 낙원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세상 안에서 그 사랑을 선물로 누립니다.
백향목은 성전을 짓던 나무입니다. 지난 몇 주 다윗이 모으던 그 나무가 오늘은 사랑의 처소를 덮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여인이 찾던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이 여기서 열립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맺는 말
본문을 다시 꿰어 봅시다. 노래 중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여인은 먼저 사랑을 갈망하고, 연인이 그녀를 방으로 이끕니다. 그녀는 남들의 시선 앞에서 그을린 자신을 감추지 않고 "검으나 아름답다" 고백하며 사랑하는 이가 쉬는 곳을 묻습니다. 그는 그녀가 흔들린 바로 그 자리에서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 부르고, 두 사람은 서로를 어여쁘다 노래하며 푸른 숲을 신방으로 삼습니다.
갈망, 고백, 그리고 화답입니다.
이제 이 노래를 성경 전체의 빛으로 듣습니다. 구절 하나하나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찾고 부르는 이 장면 전체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비춥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조용하게 인간의 공간에 들어오셔서, 권능으로 압도하기보다 우리에게 구애하고 우리의 마음을 끄시며, 우리가 그분의 품을 찾아 먼저 나설 때 분명히 기뻐하신다."
첫째, 그분이 먼저 이끄십니다. 여인은 "나를 이끌라" 구했고,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그 백성을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12:32)
십자가에 들리신 분이 우리를 그 품으로 이끄십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신부의 갈망을 우리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새벽 기도의 자리가 바로 그 응답의 자리입니다.
둘째, 그분의 눈길이 우리를 어여쁘다 부르십니다. 남들 눈에 그을려 보이는 우리를,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셔서 영광스러운 신부로 세우십니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5~27)
셋째, 그분은 우리가 찾던 목자이시며, 우리를 먼저 아십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1, 14)
신부는 "어디서 쉬게 하느냐"고 물었는데, 목자는 "나는 내 양을 안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아십니다.
이 노래의 첫날, 신랑이 신부에게 묻습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4)
오늘의 찬송이 새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입니다. 지면에 함께 실린 경배와 찬양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의 노래 드리네 나의 구주 예수님께 … 잠잠하게 주님 곁에 날 붙드소서." 처음 사랑의 노래가 오늘 우리의 새벽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신랑 곁에 머무는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 오늘의 찬송.
지면에 함께 실린 경배와 찬양의 고백 "사랑의 노래 드리네 … 잠잠하게 주님 곁에 날 붙드소서"가 1절 "노래 중의 노래"와 7절 "사랑하는 자의 곁"과 겹칩니다. 예배 여는 찬송으로.
〈목마른 사슴〉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아 갈급합니다." 2절의 갈망, 7절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 내게 말하라"의 고백입니다. 기도 시간 배경으로.
새 570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7~8절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 16절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가 선한 목자와 푸른 풀밭으로 이어집니다. 목자 곁에 머무는 결단의 자리에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여인은 햇볕에 그을린 자신을 감추지 않고 "검으나 아름다우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추거나 꾸며서 서려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는 말씀을 붙든다면 오늘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여인은 남의 포도원을 지키느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탄식했습니다.
분주함 속에 돌보지 못한 내 영혼의 포도원은 어떤 상태입니까?
오늘 하루, 목자 곁에서 "정오에 쉬는" 시간을 어디에 마련하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소서.
왕이 먼저 우리를 이끄셨음을 기억하며, 그 초대에 기도로 응답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서로의 부족함을 깎아내리지 않고,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귀히 여기며 아름답게 세워 가게 하소서.
주님, 우리를 주님의 전에 초청해 주시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걱정과 분주함으로 헝클어진 우리를 사랑과 존귀로 옷 입혀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참된 사랑 안에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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