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시편 119편 73-88절
- 박정배

- 12분 전
- 6분 분량
토기장이의 손, 줄 끝의 자리
본문: 시편 119편 73절 ~ 88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71절)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유익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이 데려다준 말씀 앞자리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주일 새벽입니다. 오늘 열여섯 절은 그 배움을 두 방향으로 밀고 갑니다. 앞의 여덟 절은 위로 — 지금 나를 누르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를 봅니다. 뒤의 여덟 절은 바닥 — 그 손을 기다리다 줄이 다 풀려 버린 자리로 내려갑니다. 정리하면 하나는 "삶의 '압력들'은 토기장이의 손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줄 끝에는 '기도'라는 이름의 자리가 있다." 오늘 그 두 문장을 따라 걷습니다.
1. 만드신 손이 아십니다 (73~74, 77절)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4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119:73~74)
롱맨이 이 시편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연결을 짚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율법 수여자 하나님이 여기서 하나로 묶인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가 단순하고 강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만들었으므로, 어떻게 옳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분이다."
생명의 삶 본문 해설도 같은 말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합니다. "제품에는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사용 설명서와 같습니다." 설명서는 사용자가 쓰지 않습니다. 만든 사람이 씁니다.
73절 '만드시고'는 시편의 다른 곳에 쓰인 토기장이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물에 확고한 구성을 부여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역본은 이렇게 옮깁니다. "made me what I am" —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드셨습니다. "삶의 '압력들'은 토기장이의 손이다."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그 무게가, 실은 나를 지금의 나로 세워 가시는 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시 139:14).
그리고 그 지으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그리고 77절을 보십시오.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지으신 분께 다시 살려 주시기를 구합니다. 만드신 손이 살리는 손입니다. 이 기도가 88절에서 다시 터져 나올 것입니다.
2. "내가 알거니와" — 그 손이 누를 때 (75~76, 83, 87절)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6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119:75~76)
75절이 오늘 본문의 심장입니다. 여기 "내가 알거니와"는 경험적 지식입니다.책에서 배운 명제가 아니라 통과하면서 알게 된 앎입니다. 그리고 그 앎의 내용이 놀랍습니다.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신 이유가 '성실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실하심'(에무나)은 '견고하다, 지탱하다'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흔들림 없이 기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고통을 하나님의 변덕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으심 쪽에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옳다고 일반론으로 인정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내 일이 되었을 때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에게 적용해서 서명한다. '내 고난까지도 의롭고 자애롭다.'"
성실하심의 다른 얼굴이 76절의 '인자하심'(헤세드)입니다. 예레미야가 폐허 위에서 두 단어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정직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해 놓고도 곧 다시 무너집니다. 83절과 87절을 보십시오.
"83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87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119:83, 87)
당시 사람들은 짐승 가죽으로 포도주 부대를 만들어, 쓰지 않을 때는 화덕 위 천장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오래 연기에 걸려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연기는 가죽 부대를 오그라들게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보기 흉하게 만들 것이다." 쓸모없고, 쪼그라들고, 그을음으로 검게 되어 볼품없어진 상태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겹이 다 아픕니다. 쓸모없어졌다는 느낌과 보기 흉해졌다는 느낌. 오랜 고통을 지나온 사람은 이 둘을 함께 앓습니다. 그런데 83절과 87절이 똑같은 구조로 끝납니다. "그러나 잊지 아니하나이다." "그러나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어떤 이는 마시고 법을 잊고, 어떤 이는 울며 법을 잊는다. 그러나 우리는 형통하든 역경이든 모든 형편에서 하나님의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오그라든 가죽 부대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욥이 여기까지 갔습니다. 그는 자기 고난의 이유를 끝내 설명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75절의 "내가 알거니와"입니다.
3. 줄 끝에 있는 자리 (81~88절 · 74, 78~80절)
"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2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119:81~82)
밴게메렌은 81~88절을 시편 119편 전반부(1~88절)의 마지막이자 절정으로 봅니다.
그 근거의 첫째가 '소멸하다'라는 어근이 세 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피곤하오나"(81절), "피곤하니이다"(82절), "거의 멸하였으나"(87절). 81~82절은 비유적이고, 87절은 문자적이다. 처음에는 마음이 다 닳는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목숨이 실제로 다 닳아 갑니다.
81절부터 83절까지는 각 절이 앞 행의 낙심과 뒤 행의 굳건함으로 대조된다는 것입니다. "피곤하오나 —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무너짐과 붙듦이 한 절 안에 나란히 있습니다. 지쳤다는 말과 바란다는 말이 같은 문장 안에 있어도 됩니다. 매튜 헨리가 한 줄로 요약합니다. "눈이 쇠하여도 믿음은 쇠해서는 안 된다."
이 새벽에 나와 앉은 우리가 그 자리입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그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시 130:5~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84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 85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86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119:84~86, 88)
모티어가 이 연에서 남긴 문장이 오늘 새벽의 핵심입니다.
"우리 줄 끝에는 '기도'라는 이름의 자리가 있다. 아주 흔히 기도는 고난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지만, 실은 가장 확실한 치료약이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힘들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힘이 없다고 말하며 기도를 놓습니다. 그런데 그 놓아 버린 것이 유일한 약이었습니다.
86절의 "나를 도우소서"는 외마디입니다. 헨리가 이 짧은 기도를 이렇게 높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는 탁월하고 포괄적인 기도다. 그것이 가볍게, 입버릇으로 쓰이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84절의 "얼마나 되나이까"라는 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로움 가운데 그는 주 앞에서 정직하게 탄식하며 질문하고 간구합니다. 질문 자체가 신앙 행위입니다. 그리고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이것을 '목숨만 부지시켜 주소서'로 옮기는 것은 너무 좁습니다. 그리고 살기를 구하는 이유가 뒤에 붙습니다.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말씀을 지키려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을 자기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74절과 79절을 보십시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74절).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79절).
시인은 같은 적의에 시달리면서도, 그 적의를 남들이 그의 흔들림 없는 소망을 보고 기뻐하며 그에게로 모여드는 방식으로 견디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이 고난을 없애 주소서"에서 "이 고난이 남이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로.
그래서 78절에서도 그는 맞받아치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엎드러뜨린 자들 앞에서 그가 하는 일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80절, 모티어는 여기 '완전한 마음'을 모든 능력이 말씀을 중심으로 완전히 통합된 내면이라고 풀었습니다. 밖에서 오는 수치보다 무서운 것은 안에서 마음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줄 끝까지 가 보신 한 분을 만납니다. 겟세마네입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주님도 줄 끝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고 74절과 79절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응답된 자리가 어디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주님은 상처를 지우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증거로 들고 오셨습니다. 못 자국이 도마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씁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러므로 88절의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는 부활에서 응답을 받았고, 우리가 살아난 목적도 그분이 정하셨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맺는 말
유대인의 오랜 관습은 왼쪽 손목에 말씀을 매고 이마에 말씀을 붙이는 것입니다. 손목은 눈에 보이는 행동을, 이마는 보이지 않는 생각을 뜻합니다. 오랫동안 우울증과 싸워 온 어느 목사의 딸은 절망 속에서도 말씀을 붙잡으려고 자기 팔뚝에 성경 구절을 새겼다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보다 더 깊은 데를 말합니다. 손목이나 이마나 팔뚝이 아니라 나를 만드신 손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나를 가장 잘 아시고, 지금 나를 누르는 압력조차 그분의 손입니다. 그러니 주일 아침에 두 가지를 가지고 나갑시다.
첫째, 만드신 분이 아십니다. 설명서는 제작자가 씁니다.
둘째, 줄 끝에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자리의 이름은 기도이고, 이미 우리 주님이 먼저 앉아 보신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매튜 헨리가 이 연에 남긴 한 문장을 오늘 주일의 선물로 받읍시다.
"하나님이 계신 떨기나무는 불타되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 — 오늘의 찬송. 76~77절 인자하심과 긍휼을 구하는 기도와 맞닿습니다.
〈항상 진실케〉 — "삶의 압력들은 토기장이의 손"이라는 모티어의 통찰과 겹칩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압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형벌이 아니라 토기장이의 손으로 읽으려면, 오늘 주일 예배에서 어떤 기도가 필요합니까?
지친 뒤로 내 삶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기도였다면, 오늘 다시 앉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성도들이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75절)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서게 하시고, 갈라지지 않은 온전한 마음(80절)을 각 사람에게 주소서.
오래 기다리다 지친 지체들이 기도를 놓지 않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견딤을 보고 기뻐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오늘 주일 예배와 다음 세대와 환우들을 붙들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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