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오늘의 묵상 - 시편 119편 65-72절

고난이 데려다준 자리

본문: 시편 119편 65절 ~ 72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57절)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몫이 되시면 삶의 일정표가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여덟 절은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어제는 우리가 삶을 정돈했다면, 오늘은 주님이 우리 삶을 재조정하십니다. 그런데 그 재조정의 도구가 뜻밖입니다. 고난입니다.

모티어는 이 연에 「주님의 학교를 졸업함」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의 학교의 학생이고, 그분은 그 학교의 교장이시며, 졸업의 상은 그의 말씀이라는 보배다."

토요일 새벽입니다. 내일 주일을 앞두고 한 주간을 되짚는 자리에서, 지난 엿새 동안 나를 눌렀던 그 일이 무엇을 위한 시간이었는지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1. 매 맞는 자리에서 다섯 번 "선하다" (65~66, 68절)

"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119:65~66, 68)

이 연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토브', 곧 '선하다'는 말이 다섯 번 울립니다.

① 주께서 선을 행하셨다(65절) ② 그는 선한 명철의 원천이시다(66절) ③ 그는 선하시다(68절) ④ 고난이 선하였다(71절) ⑤ 그의 법이 재물보다 선하다(72절).


주목하십시오. 이 사람이 "선하다"를 다섯 번 말하는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그를 치던 자리입니다(69절).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두고 "선하시다"라고 합니다.

68절이 그 근거입니다. 앞의 선하사('토브-아타')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성품을, 뒤의 선을 행하시오니(사역형 '우메티브')는 그 성품이 세상 속에서 지속적이고 능동적으로 발현되는 실행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만 한 분이 아니라 지금 선을 행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벌어진 이 일도, 이해되지 않아도, 선하신 분의 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절을 아예 기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는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나이다. 주여, 주의 율례를 가르치사 나도 선해지고 선을 행하며, 선한 마음을 품고 선한 삶을 살게 하소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그리고 66절의 '명철'이 흥미롭습니다. 키드너는 이 단어가 문자적으로 '맛'이라고 짚습니다. 예술적 안목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입니다. "입이 음식을 맛봄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욥 34:3). 신앙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입맛(취향)을 바꾸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을 맛본 사람은 세상의 부귀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명철을 구하게 됩니다. 그 명철이 어디서 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2. 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일도 아닙니다 (67, 70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이 한 절을 두고 주석들이 갈립니다. 그리고 그 갈림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롱맨은 67절을 이 연의 "가장 흥미로운 폭로"라고 부릅니다. 시인이 자신의 괴로움을 자기가 곁길로 들어선 결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밴게메렌도 같은 방향입니다. "언약 파기자였던 그가 이제 언약 준수자로 회복되었다." 곧 이 사람은 억울하기만 한 의인이 아닙니다.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뜨거움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키드너는 정반대 쪽에서 경고합니다. 어떤 번역이 이 절의 '고난받았다'를 '벌받았다'로 바꾼 것은 오도라는 것입니다. 119편의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이 키드너의 못박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겹을 다 붙드십시오. 내 잘못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형벌은 아니다. 회개 없이 고난만 해석하는 신앙도, 모든 고난을 징벌로 읽어 사람을 짓누르는 신앙도 이 연에는 맞지 않습니다.


67절의 '그릇 행하였다'(샤가그)라는 단어가 이 균형을 붙들어 줍니다. 이 말은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반역이라기보다 길을 잃고 궤도에서 이탈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다'(아나)는 '낮아지다, 겸손해지다'입니다. 고난의 본질은 우리를 낮추어 그 낮아진 자리에서 다시 말씀을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채찍질은 아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에게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광야의 사십 년이 그러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네가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그리고 70절이 반대편 그림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 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기름 덩이는 말씀이 전혀 투과되지 못하는 완악함입니다. 고난으로 낮아져 말씀 앞에 선 사람과, 안락함 속에서 영적으로 둔해진 사람이 여기서 갈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가장 잘 벗어나는 때는 편안하여 이 세상을 제집인 양 여길 때다."


3. 유익은 어디에 있습니까 (69, 71~72절)

"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119:69, 71~72)

먼저 69절입니다. 거짓 소문이 그를 덮칠 때 그가 택한 대응이 무엇입니까. 맞고소가 아닙니다.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거짓의 언어에 맞서는 가장 강한 답은 자기변호가 아니라 묵묵히 계속되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71절, 오늘의 정점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익이 고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목적절과 함께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유익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이 데려다준 자리, 곧 말씀 앞에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신앙이 잔인해집니다. 고난이 그 자체로 좋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은 나를 세워 두던 자리에서 떼어내 말씀 앞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그 자리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졸업의 상이 72절입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하나님 바로 그분의 음성을 녹음한 것을 듣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편다는 것은 하나님의 육성을 다시 듣는 일입니다. 시편이 같은 값을 매겼습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바울이 이 학교를 온몸으로 다녔습니다. 그에게는 평생 그를 괴롭힌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세 번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가시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 야고보도 같은 문법을 씁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한 분께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형벌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벌은 이미 다른 분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고 그 학교를 먼저 다니신 분도 그분이십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주님이 다니신 학교를 우리가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교장은 같은 분이십니다. 마침내 72절의 고백은 사도의 고백으로 자랍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맺는 말

오늘 묵상 에세이에 R. T. 켄달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런던에 온 첫해, 운전면허가 무효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마침 아이들을 데리러 나가려던 아내에게 그 소식을 전했더니, 아내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 같아요. 전에는 불평과 원망으로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이 시험에서 꼭 A+를 받고 싶어요." 그리고 켄달은 말라기의 한 구절을 붙들라고 권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같은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원망의 자료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표가 됩니다. 차이는 사건에 있지 않고 누구의 학교인 줄 아느냐에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한 문장도 여기 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원을 가지고 우리를 키우시되, 광야 같은 자리에서 키우십니다.


내일은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나를 눌렀던 그 일을 형벌로 읽지 마십시오. 동시에 나와 무관한 남의 일로 밀어내지도 마십시오. 그것은 선하신 교장 선생님의 수업이었습니다. 그 수업이 오늘 우리를 어디로 데려왔습니까. 말씀 앞입니다. 지금 여기입니다. 내일 주님의 날, 그 졸업장을 손에 들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 오늘의 찬송.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 66절의 '맛보는 명철'과 67절의 돌아섬을 함께 담은 곡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 고후 12:9의 응답을 그대로 노래하는 곡.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지금 내가 통과하는 어려움을 나는 '형벌'로 읽고 있습니까, '남의 일'로 밀어내고 있습니까? 67절의 두 겹 — 내 잘못과 무관하지 않되 형벌은 아니라는 것 — 앞에서 오늘 정직하게 인정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71절이 말하는 유익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이 데려다준 자리에 있습니다. 이번 주 고난이 나를 말씀 앞으로 데려다 놓은 순간이 있었습니까? 내일 주일 예배에 그것을 무엇으로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성도들이 고난 앞에서 원망의 언어가 아니라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는 고백의 언어를 먼저 배우게 하소서.


거짓과 오해로 마음이 상한 지체들이 자기변호가 아니라 전심의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시고, 내일 주일 예배가 그 모든 수업의 열매를 주께 올려 드리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댓글


Contact Us.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61  |  office@thevit.org  |  Tel: 031-272-7822 ㅣ FAX: 031-217-7822

  • White Facebook Icon
  • White YouTube Icon
  • White SoundCloud Ico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