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시편 119편 49-64절
- 박정배

- 16시간 전
- 6분 분량
내 소유는 이것이니
본문: 시편 119편 49절 ~ 64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아홉 번 내민 빈손이 마침내 사랑하는 계명들을 향해 들린 손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유롭게 걷고, 왕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즐거워하며 손을 드는 사람. 눈부신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삶이 늘 그렇습니까. 오늘 열여섯 절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자인 단락은 삶이 끊이지 않는 승리라는 바브 단락의 인상에 균형을 잡아 준다. 말씀이 주는 자유(45)와 담대함(46)과 기쁨(47~48)은 말씀을 결연히 붙드는, 종종 고달픈 일로 지켜져야 한다."
승리의 다음 날이 오늘입니다. 조롱이 있고, 나그네 된 집이 있고, 잠 오지 않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손에 들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56절). 그리고 곧바로 그 소유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57절). 오늘 그 길을 함께 걷습니다.
1. 기억이 사람을 붙듭니다 (49~52절, 55절)
"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119:49~50, 52)
이 여덟 절을 묶는 실이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어 '자카르', 기억하다입니다. 이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49, 52, 55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쌍방향이라는 것입니다. 49절에서는 "주여, 기억하소서"라고 구하고, 52절과 55절에서는 "내가 기억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기억하심'으로 언약에 신실하시기를 기대한다면, 그의 '종'도 끊임없이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49절의 "기억하소서"는 하나님이 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탄식시의 흔한 간청으로, 이미 하신 언약에 부합하게 지금 행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①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다 ② 하나님이 그 약속을 붙들 소망까지 은혜로 지어 주셨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 정리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몫으로 삼는 자는 겸손한 담대함으로 그것을 자기 변론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렇게 했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50절이 이 연의 심장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고난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 안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한절 묵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위로는 일시적이며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만, 하나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온전히 치유하고 다시 살려 냅니다."
그리고 55절,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밤은 불안이 가장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였으므로, 낮 내내 주의 법을 지키기에 조심하였나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란 결국 무엇을 기억하느냐의 싸움입니다.
2. 조롱 속에서, 나그네 된 집에서, 줄에 얽힌 채 (51, 53~54, 61절)
"51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5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54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119:51, 53~54)
시인의 형편이 드러납니다. 그는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그의 기도를 '허튼소리'라 하고, 그의 진지함을 '우울증'이라 하고, 그의 엄격함을 '쓸데없는 까다로움'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튜 헨리는 이렇게 씁니다. "개가 짖어도 나그네는 제 길을 간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진 말 한마디 못 견디는 자는 그분을 위해 견딜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51절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은 무죄 완전주의의 주장이 아니라 배교를 강조법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떠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53절에서 이 사람은 그들이 자기에게 끼치는 고통보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에 더 분개합니다. 우리의 분노는 대개 어느 쪽입니까. 같은 압박이 61절에 다른 그림으로 다시 나옵니다.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밴게메렌은 이 '줄'을 혀와 음모와 억압으로 다스리는 악인의 공포정치에 대한 은유로 읽습니다. 조롱이 말로 오고, 줄이 되어 몸을 감습니다. 그런데도 떠나지 않고,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54절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19절의 고백과 같이 나그네된 우리는 임시로 묵고 있습니다. "다윗의 궁전조차 그의 순례의 집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그런데 그 묵는 집에서 무엇을 합니까. 노래합니다.
바이올린 명장 마틴 슐레스케는 가장 아름다운 울림을 내는 재료가 수목 한계선의 극한 환경에서 자란 가문비나무라고 말합니다. 바람과 추위를 견딘 나무라야 울림통이 됩니다. 나그네 된 집이 노래를 만듭니다.
바울도 성도의 일상을 그렇게 그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내 소유, 나의 분식 - 그래서 일정표가 달라집니다.(56~60, 62~64절)
"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8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19:56~58)
56절과 57절 사이가 오늘 본문의 이음매입니다. 56절 지킨다는 것은 '온전히 간직하다(keep intact)'입니다. 축내지 않고 그대로 지키는 것, 수탁자의 지킴입니다. 그런데 지켰으니 상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순종이 이 복들을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은 우리를 돌려세워 그 복들을 받게 한다."
그리고 57절이 그 '소유'의 정체를 밝힙니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이것은 레위 지파의 어법입니다. 가나안 땅을 나눌 때 레위 지파만 땅을 받지 못했고, 대신 이런 말씀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 "You are all I want, Lord" — 주님, 제가 원하는 전부가 주님이십니다.
시편이 이 고백을 되풀이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 16:5).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고백을 감상으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57절 후반이 곧바로 붙습니다.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자기 몫으로 삼는 자는 그분을 자기 왕으로 삼고 그분께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그리고 59~60절이 그 충성의 모양입니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헨리는 여기서 세 단계를 읽습니다. 생각했다 · 돌이켰다 · 지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뼈아픈 한마디를 남깁니다. "남의 길에 대해서는 매섭게 평하면서 자기 길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자가 많다."
60절 '지체하다'는 롯이 소돔을 떠나기 싫어 '지체하던' 바로 그 단어라는 것입니다. 지체에서는 소돔 냄새가 납니다. 우리가 순종을 미루는 이유는 대개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두고 온 것이 아까워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119:62~64)
62절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실제적인 절입니다. "말씀을 즐거워할 시간을 내도록 삶을 정돈함." 신앙은 표류가 아니라 일정 조정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에 대한 믿음이 승리하여, 주께서 아직 그의 요청을 처리하지 않으셨을 때에도 감사의 노래를 이끌어낸다!" 응답을 받고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한밤중에 일어납니다.
55절의 밤과 62절의 밤이 여기서 만납니다. 밤에 기억하던 사람이 이제 밤에 일어납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랬습니다. 매를 맞고 깊은 옥에 갇혀 발이 차꼬에 채인 그 밤에,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시편 기자도 이미 노래했습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매튜 헨리의 두 마디를 오늘 새벽 기억합시다. "공적 예배가 은밀한 예배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 "누워 잠들 수 없을 때 그는 일어나 기도하곤 했다."
63절에서 친구 목록의 기준도 바뀝니다. 신분도 이익도 아니고 주를 경외하느냐입니다. 그리고 64절, 시야가 온 땅으로 열립니다. 헤세드가 모든 피조물을 향한 돌보심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려갑니다. 창조 질서를 향한 사랑이 이토록 크다면, 충성하는 자에게는 얼마나 더 놀랍겠는가. 바울이 정확히 같은 논법을 씁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32).
여기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49절의 "기억하소서"라는 기도가 어디서 응답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셔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마지막 밤에 떡을 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 22:19). 그러므로 57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자기 분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값으로 치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오늘 묵상 에세이에서 김양재 목사는 남편을 먼저 보낸 뒤의 두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궁리하는 대신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말씀을 묵상했더니,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그때그때 주시는 말씀을 따라가게 되었고, 어느새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에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말씀은 영원하지만 두려움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존 오웬의 한 줄도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얼굴을 감추신 것 같은 때에도 그분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 오는 무미건조함은 실패가 아닙니다. 수탁자의 시간입니다. 조롱 속에서, 나그네 된 여관에서, 잠 오지 않는 밤에, 맡은 것을 축내지 않고 붙들고 있는 그 시간. 하나님은 그 시간을 세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마지막에 손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 그리고 그 소유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오늘 하루, 붙들고 있는 사람으로 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가는 것은〉 — 54절 "나그네 된 집"에서 부르는 노래, 그 자체입니다.
〈내가 주인 삼은〉 — 57절 분깃의 고백을 오늘의 언어로 옮긴 곡입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지금 은혜의 절정에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 감흥 없이 붙들고만 있는 '수탁자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그 시간을 실패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는 고백이 지난 한 주 내 일정표를 실제로 바꾼 자리가 있습니까? 말씀을 즐거워할 시간을 내기 위해 이번 주 무엇을 조정하겠습니까(62절)?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성도들이 인생의 밤에도 주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시고,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노래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세상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분깃으로 삼게 하시고, 그 고백이 삶의 일정과 우선순위를 실제로 정돈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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