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시편 119편 17-32절
- 박정배

- 2일 전
- 5분 분량
나그네가 달리기까지
본문: 시편 119편 17절 ~ 32절
여는 말
어제 우리는 시편 119편의 첫 열여섯 절에서 "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이라는 탄식이 마음의 금고에 쟁여 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열여섯 절은 그 사람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기멜 연(17~24)과 달렛 연(25~32)입니다.
베트가 "우리의 정욕이 거룩한 삶을 쉽지 않게 한다"고 했다면, 기멜은 "우리의 환경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합니다. 땅은 낯선 곳이고(19절), 고관들이 앉아서 비방하며(23절), 마침내 영혼이 진토에 주저앉습니다(25절). 기멜 연에 아예 "탄식의 표현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달렛 연에 "나를 살리소서!(Revive m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열여섯 절은 진토에서 시작해 달음질로 끝납니다. 19절의 나그네가 32절에서 달립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상황은 한 번도 바뀌지 않습니다.
1. 나그네가 구한 한 가지 (17~20절)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19:18)
17절이 먼저 나옵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후대하다'는 것은 "충분히 공급하여 주소서(make full provision for)"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18절에서 한 가지를 특정합니다. 바로 말씀을 그 온갖 놀라움 가운데 깨닫는 능력입니다.
18절의 '눈을 열어'라는 은유가 무엇입니까.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같은 산, 같은 아침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상황이 아니라 눈이었습니다. 같은 성경을 놓고 누구는 글자만 읽고 누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봅니다. 차이는 말씀에 있지 않고 그것을 보는 눈에 있습니다. 이 은유의 본질은 휘장을 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6).
"우리는 본성상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눈이 멀었다. 그분의 은혜가 우리 눈에서 비늘을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 매튜 핸리
19절,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나그네'(게르)는 토지 소유권이 없는 거류 외국인입니다. 소유가 없다는 것은 곧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그들의 집이요, 세상은 다만 그들의 여관, 그들의 순례의 땅이다."
히브리서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베드로도 그렇게 부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그런데 이 나그네가 무엇을 구합니까. 여기가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심장입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지상의 안락도 아니고, 물질의 공급도 아니고, 심지어 본향으로 돌아감도 아닙니다. 온 존재를 삼키는 갈망으로 그가 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앎입니다.
20절이 그 강도를 보여 줍니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여기 '상하다'는 문자적으로 "부서졌다"입니다.
2. 고관들이 비방할 때 그는 읊조렸습니다 (21~24절)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119:23~24)
21절이 갑자기 어조를 바꿉니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1~3절의 복 ↔ 21절의 저주. 이 '교만한 자들'(제딤)이 시편 119편의 핵심 대적으로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매튜 헨리의 한 줄이 서늘합니다. "모든 고의적인 죄의 밑바닥에는 교만이 있다."
22절에서 압박이 구체화됩니다.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2절의 히브리어가 "굴려 치우다(rolled)"임을 짚으며, 비방이 사람 위에 얹혀 있는 무게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모진 말과 더러운 말이 뼈를 부러뜨리지는 않지만, 여리고 진실한 영혼에게는 몹시 아프다."
그리고 23절. 힘 있는 자들이 앉아서 작정하고 험담하는데, 이 사람은 무엇을 합니까.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읊조립니다. 헨리의 문장이 압권입니다.
"그들이 그를 대적하여 말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를 위하여 말해 주는 것을 발견했다."
24절이 이 연의 결론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이것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최선의 조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군왕에게도 사인(私人)에게도 최고의 모사가 된다.
'충고자'라는 이 단어에서 우리는 한 이름 앞에 서게 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 아기의 이름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24절의 '충고자'가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참된 나그네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고관들에게 비방당하시고 결국 성문 밖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나그네가 우리의 눈을 여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3. 진토에 붙은 영혼이 달려가기까지 (25~32절)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25)
25절에서 이 나그네가 주저앉습니다. "내 영혼이 티끌에 붙었나이다." 앨런은 여기 '티끌'(아파르)을 스올로 읽습니다. 곧 이것은 우울감 정도가 아니라 죽음 같은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28절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밴게메렌은 여기 '슬픔'(투가)이 깊은 비통과 번민이라고 못 박고, 앨런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 "나는 극심한 슬픔으로 무너졌다(I have collapsed)."
그런데 이 연, 여덟 절 안에 일곱 개의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주저앉은 사람이 기도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25절과 28절이 똑같은 근거를 답니다 — "주의 말씀대로." 시인이 내세우는 가장 강한 근거는 자기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약속입니다.
무엇을 구했습니까?
26절,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27절,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심장입니다.
"역경 중에 시인은 더 가르침 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In adversities the psalmist becomes more teachable)."
무너진 사람이 구한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이해력이었습니다. 매튜 헨리가 이 대목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조를 만듭니다.
"그는 '주여, 이제 내 운명을 말씀하시고 결말이 어찌 될지 알려 주소서' 하지 않고, '주여, 이제 내 의무를 말씀하소서. 이 형편에서 주께서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알려 주소서' 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대개 "언제 끝납니까"를 묻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를 물었습니다.
29절도 같은 결입니다.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은혜로이 가르치소서'가 히브리어로 한 단어, '은혜를 베푸소서'임을 짚고 이렇게 명제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좋은 선물이며, 구원을 벌어보려는 데 사용될 때에만 은혜의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30~32절은 경건을 세 동사로 요약합니다. 택하고, 붙좇고, 달리는.
30절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헨리는 이 구절을 "글씨를 배우는 자가 본보기 글씨를 앞에 놓듯이"라고 읽습니다.
31절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여기 아름다운 전환이 있습니다. 25절에서 그의 영혼은 진토에 '붙어' 있었습니다. 31절에서는 그가 주의 증거들에 '붙어' 있습니다. 같은 붙듦인데 방향이 절망에서 신앙으로 뒤집혔습니다.
그리고 32절,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1절과 3절에서 '걷던' 사람이 이제 '달립니다'. 다만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달림도 내 힘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진토에 붙은 영혼을 누가 일으키십니까. 오늘 생명의 삶 설교 길잡이가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께로 갑니다. 그 말씀이 마침내 육신이 되어 오셨고 죽음의 진토를 뚫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그러므로 25절의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는 허공에 던지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이미 무덤을 여신 분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맺는 말
오늘 생명의 삶 예화 클립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단에 빠져 방탕하게 살던 청년이 정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펴서 읽어 보아라! 펴서 읽어 보아라!" 그가 책장 한구석에 버려 두었던 성경을 펼쳤고, 로마서 13장의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진토에 붙어 있던 영혼이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묵상 에세이에서 J. D. 그리어도 이렇게 씁니다. "역사의 옳은 편에 서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하나님 말씀 편에 서려고 하라."
오늘 열여섯 절을 다시 봅니다. 나그네는 여관을 고치려 들지 않고 지도를 보았습니다. 고관들의 입을 막아 달라고 하지 않고 율례를 읊조렸습니다. 진토에서는 "언제 끝납니까"가 아니라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를 물었습니다. 한 번도 상황이 바뀌지 않았는데, 걷던 사람이 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성경을 펴기 전에 먼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기도하고, 눌리는 자리에서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오늘 아침도 새롭습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 오늘의 찬송. "주의 도를 내게 알리소서 진리의 길로 행하리" — 18절의 기도가 그대로 첫 소절입니다.
<주의 도를 내게 알리소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어려움 앞에서 무엇을 먼저 구합니까 — 상황이 바뀌기를, 아니면 눈이 열리기를(18절)? 오늘 성경을 펴기 전에 드릴 기도를 한 문장으로 적어 봅시다.
지금 나는 무엇에 '붙어' 있습니까(25절과 31절)? 최근 나를 아프게 한 말에 맞대응하는 대신 읊조릴 말씀 한 절을 정해 이번 주 내내 붙들어 봅시다(23절).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 성도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도 안락이 아니라 말씀 깨닫기를 먼저 구하게 하시고, 새벽마다 눈을 여시는 은혜를 부어 주소서.
질병과 실패와 상실로 영혼이 진토에 붙은 성도들을 주의 말씀대로 살아나게 하시고, 고난 중에 더 가르침 받을 만한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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