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시편 119편 1-16절
- 박정배

- 19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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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의 금고
본문: 시편 119편 1절 ~ 16절
여는 말
지난 두 달 우리는 에스겔을 걸었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고, 성전 문지방 밑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시편 119편에 들어섭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 176절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스물두 자를 따라 여덟 절씩 묶은 답관체(答冠體) 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열여섯 절은 그중 첫 두 연, 알렙(1~8)과 베트(9~16)입니다.
이 시편을 "여덟 개의 종(a ring of eight bells)"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율법·증거·법도·율례·계명·규례·말씀·약속 — 성경을 가리키는 여덟 개의 동의어가 한 벌의 종처럼 176절 내내 번갈아 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서재에서 지어진 노래가 아닙니다. 오늘 열여섯 절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선언으로 시작해서, 탄식으로 꺾이고, 마침내 금고 하나를 여는 데서 답을 찾습니다.
1. 복이 있음이여 — 이것이 사실이다 (1~4절)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119:1)
첫 단어가 히브리어 '아쉬레', "복되도다"입니다. 시편 1편의 첫 단어와 똑같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시편 1편이 두 절로 말한 것을 시편 119편은 176절에 걸쳐 풀어냅니다.
1절의 '온전하다'는 도덕적 무결점이 아닙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완전히 통합된 삶"입니다. 밖으로는 걸음, 안으로는 마음이 하나로 꿰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2절,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성경이 존중받는 것은 그것이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그로써 책 자체가 아니라 그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율법을 사랑하는 노래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노래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3절,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이 비췹니다. 악을 피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의 도를 걷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의 문장이 아픕니다. "신앙을 우리 담화의 주제로 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신앙을 우리 걸음의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4절,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히브리어에서 '주께서'는 강조형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참고할 조언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2. 오, 내 길이 굳게 정해진다면 (5~8절)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119:5)
여기가 이 시편의 출발점입니다. 5절은 이 단락의 축(pivot)입니다.
1~4절은 객관입니다 — "이것이 사실이다." 5절부터는 주관입니다 — "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5절 Oh, that my ways were steadfast… 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다!!
보십시오.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제가 지키겠습니다"가 아니라 "내 길을 굳게 정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편은 도달한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갈망하는 사람의 노래입니다. 이 자리를 아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6절,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여기 '부끄럽다'(보쉬)는 단순한 민망함이 아닙니다. "주께 버림받고 완전한 파멸에 처해진 상태"로 정의하고, 여기에 따돌림과 조롱이 겹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7절에서 배움이 감사가 됩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사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의 학생이며 그분 발치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8절, 첫 연의 마지막 절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앨런은 8절 후반이 이미 탄식 청원을 도입한다고 지적합니다. 시편 119편은 첫 여덟 절 안에서 벌써 위기의 노래임을 드러냅니다. 밴게메렌이 잡아낸 언어유희가 아픕니다. 4절에서 시인은 주의 법도를 "심히(메오드)" 지키게 하셨다고 고백했는데, 8절에서는 나를 "심히(아드-메오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구합니다. 심히 지키려는 사람이 심히 버려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기도는 이미 응답되었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왜 그렇습니까. 아주 버림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부르짖으신 분이 계셨기에, 우리의 8절 기도가 안전해졌습니다.
그리고 1절의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 — 이 사람이 역사상 딱 한 분 계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1절의 복은 우리가 기어올라 얻는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씌워지는 복입니다.3. 그 답은 마음의 금고에 있습니다 (9~16절)
3. 그 답은 마음의 금고에 있습니다 (9~16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9, 11)
5절의 "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9절부터가 그 답입니다. 베트 연은 스물두 연 가운데 유일하게 질문으로 시작하는 연입니다. 그리고 모티어가 이 연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문제는 바깥에 있으나(9절) 답은 안에 있다(10~16절)."
먼저 '청년'을 좁게 읽지 마십시오. 여기 쓰인 '나아르'가 르호보암과 동갑인 사람들, 곧 마흔 줄에게도 쓰인 단어임을 짚습니다(왕상 12:10). 욕망과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이 여기 서 있는 '청년'입니다. 그리고 질문의 성격을 보십시오. 여기 '무엇으로'가 "어떤 수단으로?"라는 지극히 실천적인 물음이라고 짚습니다. 원론이 아니라 방법을 묻는 것입니다.
10절,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여기 '떠나다'(샤가)는 의도치 않게 실족하는 죄가 아니라 고의적인 죄를 가리킵니다. 전심으로 찾는 사람도 알면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1절이 이 연의 절정이고, 오늘 열여섯 절의 답입니다. '마음에 두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판'은 감추다, 비축하다, 보물처럼 저장하다라는 뜻입니다. 금고에 귀중품을 넣듯 말씀을 영혼 깊은 곳에 쟁여 둔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의 문장을 그대로 옮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쌓아 둘 만한 보화이며, 그것을 안전하게 쌓아 둘 곳은 우리 마음밖에 없다. 집과 손에만 두면 원수가 빼앗아 갈 수 있고, 머리에만 두면 기억이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그 말씀의 거푸집에 부어지고 그 새김이 우리 영혼에 남아 있으면, 그것은 안전하다."
"마음에 둔다"는 것을 암송으로만 좁히지 말라고 못 박습니다. 이것은 전인적 삶의 헌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12절,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찬송이 간구 앞에 옵니다. 그래서 그가 내리는 결론이 이것입니다. "마음이 찬양으로 가득하지 않으면 경건의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13절부터 금고에 쟁인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모티어가 이 절의 구조를 절묘하게 짚습니다. 절이 사람의 입술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입으로 끝납니다. 14절은 그 기쁨을 재물에 견줍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다윗이 이미 노래한 그대로입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15절 이전까지 주동사들은 모두 '결단의 완료형'입니다 — 찾기로 작정했다, 감추기로 작정했다, 선포하기로 작정했다, 즐거워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15절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에서 같은 생각이 기도로 바뀝니다. 그의 결론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은 반드시 기도에 담가져야 한다." 16절이 그렇게 닫힙니다.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금고를 가장 완전하게 채우신 분이 계십니다. 광야에서 마귀 앞에 서셨을 때 예수님이 무엇으로 이기셨습니까. 마음에 쟁여 둔 말씀이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9절의 질문에 온전히 대답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씻으십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우리의 깨끗함은 쥐어짜는 결심의 산물이 아니라,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신부를 씻으시는 은혜입니다.
맺는 말
오늘 생명의 삶 묵상 에세이에서 조정민 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공부해서 깨달아지는 책이 아니라 그냥 먹어야 하는 책이라고. 아기가 부모의 말을 공부하지 않고 그냥 먹듯이 말입니다. 시편 23편을 하루에 열 번씩 1년 내내 먹다 보면 그 말씀에 배가 부르고, 그 말씀 때문에 부족감에서 풀려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조엘 비키의 말도 함께 실렸습니다. "머리의 지식이 마음의 지식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손의 지식으로 이어져야 한다."
오늘 열여섯 절이 걸어간 길을 다시 봅니다.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선언(1~4) → "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이라는 탄식(5~8) → 마음의 금고에 쟁여 둔 말씀(9~16). 1~4절을 읽고 "그렇지, 그게 복이지" 하고 끄덕이는 데서 멈추면 이 시편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5절로 내려가야 하고, 11절까지 가야 합니다.
지금 내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집과 손입니까, 머리입니까, 마음입니까. 오늘 하루, 한 절이라도 마음의 금고에 넣으십시오. 그리고 그 결단을 기도에 담그십시오. 시편 119편의 첫 걸음이 오늘 거기서 출발합니다.
오늘의 찬양
새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 오늘의 찬송.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 1절의 '복'과 5절의 '순종'을 한 후렴에 담은 곡입니다.
새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 5절 "내 길을 굳게 정하사"의 기도를 그대로 노래합니다.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나는 1~4절을 읽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갑니까, 아니면 5절의 "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까지 내려갑니까? 오늘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나의 '아직'은 무엇입니까?
오늘 마음의 금고(11절)에 넣을 한 절을 정한다면 어느 절입니까? 그 결단을 새벽 기도에 담가 봅시다(15절).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시편 119편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도마다 말씀을 지식이 아니라 양식으로 먹게 하시고, 새벽마다 그 말씀이 삶의 걸음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자기 결심으로 신앙을 버텨 오다 지친 성도들을 붙들어 주시고, "내 길을 굳게 정하사"라고 기도하는 자리로 인도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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