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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여호수아 7장 with 칼빈주석

제7장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 범죄하였으니 …… 범죄, 특히 한 개인의 은밀한 범죄가 전체 백성에게 전가되고, 심지어 무고한 자들까지 동시에 형벌을 받는 일이 언급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범죄 때문에 전체 민족이 정죄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해 답하자면, 한 구성원의 죄가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설령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종종 악하지 않은 자들도 형제를 묵인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부추기는 경우가 있으므로, 은폐함으로써 공범이 된 자들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귀속되는 것은 정당하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고린도전서 5:4~6)은 한 사람의 비행을 들어 모든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붙은 오명을 자랑삼는 교만을 책망한다.

여기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이 그 절도 행위를 알지 못했으므로, “범죄를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않으면 공범이다”라는 격언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인적 범죄가 전체 백성에게 전가되는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전에 잘못된 행위를 단호히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범죄자가 더 대담하게 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마치 잡초가 몰래 스며들어 급속히 성장하고 해로운 열매를 맺듯, 범죄도 조속히 제지하지 않으면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체 백성에게 비밀스러운 절도를 전가하신 이유는 훨씬 깊고 난해하다. 이는 한 사람의 행위로 전체가 범죄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후세에 특별히 보여 주어, 범죄 예방에 더욱 주의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은 모든 판단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을 잠시 기다림 속에 두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지금 우리의 어둠으로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장차 생명책이 펼쳐질 때 명확히 드러나리라. 한 개인의 범죄로 인해 전체 민족이 오염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이는 최고 심판자께서 이미 선언하신 바이며, 우리는 그분의 법정 앞에서 언젠가 서야 할 존재로서 묵묵히 서 있어야 한다. 아간의 혈통이 기록된 것은 그의 수치심을 증대시키고, 마치 전파하듯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마치 그가 그의 가문과 온 족속의 불명예임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역사 기록자는 유다 지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적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와 연결된 어떤 이가 비열하고 사악하게 행동할 때, 그의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도 일종의 오점이 찍힌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는 사악한 자의 친척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 정당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모든 친척이 서로에게 상호 교정을 더 신중히 적용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둘째, 그들의 묵인이나 자신들의 잘못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더욱 큰 문제, 즉 일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은 바로 그 범죄가 민족 전체의 영광이자 꽃이라 할 유다 지파에서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장차 다스림의 희망을 키워주는 우수성이 그 지파에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덕분이었다. 그러나 막 시작 단계에서 한 개인의 행위로 이 영예가 더럽혀졌다면, 연약한 마음에게는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엄정한 처벌이 없었다면 생겼을지도 모를 스캔들을 깨끗이 지워버렸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악인이 신성을 모독할 기회를 얻었을 때, 교회가 수치를 제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범죄를 본보기로 삼아 엄벌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 보내며 …… 도시의 위치를 살펴보고 모든 접근로를 정찰한 것은 신중한 행동이었다. 이는 미지의 지역을 무턱대고 급히 지나가다가 매복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전체 병력을 이끌고 진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병력을 보내 도시를 점령하려 한 것은 군사적 능력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공격에서 2~3천 명 정도의 병력이 공포에 질려 후퇴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2~3만 명의 병력이 각 방향으로 나뉘어 식량을 수집하도록 한 것은 전체 군단에 매우 타당한 조치였다. 설사 적이 저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소수 병력이 살해 행위 자체만으로도 쉽게 지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천 명 정도가 격퇴당한 것은 그들의 자신감과 나태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병력의 적음이 패배의 원인이 아닌만큼,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신다. 참된 원인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나타내고자 하셨지만, 피해를 덜 심각하게 하기 위해 병력을 소수로 허용하신 것이다. 이는 백성을 온화하게 징계하면서도 큰 패전 없이 깨우쳐 즉각적으로 악을 바로잡도록 유도하는 드문 자비의 표시였다. 아마도 아이 성의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면 감히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심판의 길을 열어 주시되, 백성이 마치 서서히 병들어 소멸될 수도 있는 숨은 범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를 조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낮은 지대에서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 패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근접 전투에 이르기 전에 공포와 용기의 상실로 패배했음은 명백했다. 후퇴함으로써 높은 지대를 포기하고 계곡의 경사로 물러난 것이다. 반면 적은 도망치는 이들을 향해 신속히 추격하는 자신감과 대담함으로 그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진영 안에서도 모든 마음이 녹아 내릴 정도로 두려움이 팽배했다. 사실 많은 승리를 거둔 후 이렇게 참담하게 패배한 것을 본 이들에게 두려움이 있었음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 쉽게 동요하게 된다. 이번 사건에서 백성을 놀라게 한 것은 단순히 30명의 죽음과 3천 명의 도망보다 하늘로부터 내린 공포였다.


6절.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영광스럽지 않은 패배나 수치를 남에게 전가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고, 용맹한 지도자가 서른 명의 전사자를 잃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낙담하는 것도 결코 합당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병력을 백 배로 늘리기만 해도 이미 싸움으로 지친 적군을 물리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깊은 슬픔에 잠겨 절망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인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의 승패는 불확실하다는 생각 -패한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생각- 을 그는 품을 수 없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대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들이 패배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도움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 단지 애통할 뿐 아니라, 가장 참혹한 상황에서 행하던 엄숙한 애도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뿌렸다. 이러한 애도의 방식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으나, 하나님의 경건한 예배자들이 그의 진노를 간구하며 겸손히 호소할 때 특히 적절한 행위였다. 옷을 찢는 행위와 그와 함께한 여러 행위는 회개의 고백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 기도는 신앙과 경건한 정신에서 비롯된 부분과, 과도한 동요가 포함된 기도이기도 했다.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상처를 내신 그 손 안에 치유가 준비되어 있음을 인정한 것은 믿음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슬픔은 분명히 적절한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나친 자유로 하나님께 항변하며, 터무니없는 소원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 머물러 있었더라면!”-을 토해낸다. 그러나 경건한 이들이 하나님을 찾고자 열정적으로 분투할 때, 그들의 격정과 성급함 때문에 믿음의 빛이 흐려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한한 인내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모든 흠을 씻어 내신 후 순수한 기도로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모든 기도가 오점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투박한 단순함은 관용을 필요로 하지만, 교묘한 겸손을 가장하는 위선자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위선자들은 입술로는 조심스럽게 경건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교만으로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어 내신 일에 대해 항의하는 데서 절제를 넘었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거스르는 소란스러운 바램, 곧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머물러 있었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소망을 말함으로 훨씬 더 큰 방종의 행위를 하였다. 이는 완전히 하나님의 언약을 폐기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주장하고 드러내는 데 있었던 만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을 격한 표현은 사면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성도들도 비록 올바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자주 비틀거리며 넘어짐을 배운다. 이는 그들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기도는 특히 신앙의 순수함과 순종하려는 정서가 드러나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다음 절에서 분명해진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따라,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변호한다. “백성이 도망쳤다고 들을 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그는 묻는다. 그는 마땅히 불평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의 증인과 선포자로 세우셨고, 이에 따라 끝없는 승리가 이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불리한 사건들이 이어지자, 그는 자신의 직분이 모욕받는 것을 가장 고통스럽게 여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염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의 눈에 의해 훼손될까 두려워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자신이 이 땅에 백성을 인도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니, 지금과 같은 위기 속에서 자신이 마치 사람들을 속인 자처럼 보일 위험이 생긴 이상,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그에게 변론할 방법를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 그는 또 다른 두려움의 근거를 언급한다. 주변의 모든 민족들 -재난에 굴복하거나 기적에 놀라 두려움 속에 침묵하고 지내던 자들- 이 이제 다시 기세를 회복하여 갑작스럽게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의 용기를 꺾고 공포로 물들게 했으나, 일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떠나 그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이 담대히 전쟁에 나아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나안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두려움에 마비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공격 태세를 취하여, 공포에 사로잡힌 백성을 손쉽게 멸망시킬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나님께 신속한 대책을 간구하며 장래의 위험을 호소한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는 단지 백성의 안전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고 악인의 오만한 조롱에 짓밟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데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그 백성이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약속하신 그 유업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세의 노래(신명기 32:26~27)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흩으며, 그들의 기억을 사람들 가운데서 끊으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대적의 분노(교만)를 두려워함이라. 원수들이 잘못 판단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할까 염려함이라.” 하나님께서, 인간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 일을 염려하셨다고 밝히신 그 점을, 여호수아는 지금 미리 차단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적들은 이스라엘의 패배로 인해 교만하여져, 마치 하나님 자신을 이긴 것처럼 자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14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10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백성의 패배를 슬퍼한 행위 자체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얻는 올바른 방식이 바로 그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지나친 슬픔에 스스로 빠진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그러나 그 책망은 과거라기보다 미래를 향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은 그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명하시는데, 이는 곧 “너는 이미 충분히 오래 엎드려 있었다. 이제는 나태함을 모두 버리고, 다른 방식의 처방이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다만 하나님은 먼저 재앙의 원인을 밝히시고, 그다음 그것을 제거하는 방도를 지시하신다. 즉, 하나님은 전투의 실패가 참으로 백성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를 거두셨기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알리신다.

우리는 앞서, 개인의 은밀한 범죄가 온 백성에게 전가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보기에나 타인의 판단에 있어 죄가 없더라도, 동일한 정죄 아래 두신 하나님의 판단에는 우리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감추어진 이유가 있다. 우리는 절제된 태도로 묻는 것은 허용될지 모르나, 호기심으로 파헤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동시에, 형식적 선언은 모든 이들에게 내려졌으나 실제 형벌은 범죄로 실제 더럽혀진 한 가문에만 내려졌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드문 자비의 사례를 보게 된다. 이어지는 내용은 그 죄가 얼마나 중대했는지를 보이려는 것으로, 그런 이유로 문장 중 “또한”(גַּם 감) 이라는 접속사가 강조되어 반복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죄의 중대성을 축소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또한 언약을 범하였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한 과오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명칭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전리품에 관한 금지령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땅의 모든 전리품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나, 첫 이익(초실물)은 자신에게 돌릴 것을 조건으로 하여 체결된 일종의 상호 약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반적인 언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특별히 구별된 몫을 백성이 가로챘다고 고발하시는 것이다. 이어 곧바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취하였다”고 덧붙이시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훔쳤으므로 엄연한 성물 도둑질(성례 침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거짓말하다’라는 표현은 여러 본문에서 그러하듯, 기대를 저버리거나 속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행위는 겉보기에 사소해 보일지 모르나, 결코 근거 없이 죄의 정점으로 기록된다. 곧 그들이 금지된 물건을 자기들의 소유 가운데 숨겨 두었다는 점이다. 사람은 완전히 악한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탐욕에 유혹되어 죄를 저지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은닉하여 자기 재물들과 함께 보관하는 행위에는 더욱 완강한 악의 지속이 드러난다. 이는 양심의 가책이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2절 후반부에서 ‘아나쎄마’라는 용어는 전과 다른 의미로, ‘저주받음(execration)’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는 훔친 금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저주 아래 놓였고, 거의 진멸에 가까운 상태로 내던져졌음을 나타낸다.


13절.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물론 קָדַשׁ(카다쉬)라는 말은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백성의 속죄이므로, 나는 그것이 정식의 거룩하게 하는 의식을 규정한다고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일반적으로 ‘준비하다’와 동등한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은, 내 판단으로는, 그 본래의 강력한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일종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부정한 상태로 나아가지 않도록 정화가 필요하였다.

또한 거룩하게 하는 방법에 관하여 관찰할 점은,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법적 정화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의식 자체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거친 백성들을 깨우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외적 제물은 그들의 생각을 영적 정결로 돌리게 하였으며, 허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금식을 행하게 한 것은 요구되는 매우 높은, 흠 없는 순결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백성은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경고를 받음으로써, 각자가 자기 자신을 더욱 세밀히 살피도록 유도된다. 더 나아가, 주님은 마치 회개를 위해 일정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진행하신다. 이는 각 지파에서 가문으로, 나아가 결국 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된 데 다른 이유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아간의 몹시 어리석은 무감각을 보게 된다. 부끄러움에 눌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더욱 뻔뻔해지며 대담한 태도를 취하고, 자신의 창조주를 모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이 발각된 것을 보고도, 왜 그는 스스로 나아와 범죄를 자백하지 않고, 억지로 끌려갈 때까지 뻔뻔함을 고집하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탄에게 눈이 멀도록 내버려둔 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지파가, 다음에는 가문이 조사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강제되고 붙들려 있음을 명백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최소한 자발적으로 나아가 항복하여 형벌을 피하려 하지 않았는가? 이는 그가 악행으로 자신을 단단히 굳혔고, 그의 마음과 모든 감각이 사탄에 의해 매혹되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즉시 드러내지 않으시고, 항상 제비뽑기를 이용하여 드러내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례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세상에 아무리 숨겨진 것이라도 때가 되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드러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세상 전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도 하나님께는 숨김이 없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죄가 마치 잠든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문 앞에서 깨어 있으며, 불쌍한 인간을 덮쳐 압도할 때까지 그의 뒤를 쫓는다.


19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20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22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들을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23 그들이 그것을 장막 가운데서 취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가지고 오매 그들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으니라

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19절.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비록 제비뽑기에 의해서, 마치 우연히 정해진 듯이 아간이 완전히 드러났지만, 하나님께서 범인을 가리키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으므로, 여호수아는 의심 없이 아간을 심문하며, 발견이 이루어지자 그에게 자백할 것을 권면한다. 실제로, 이는 통상적인 선서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복음(9:24)에서 처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맹인에게 동일한 언어로 선서하게 하여, 우리 구주께서 회복시킨 기적에 관해 답하게 한 것과 같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도록 권면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아간이 부인하거나 얼버무렸다면, 결정의 신뢰성이 손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안은 이미 제비로 정해졌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단순히 그에게 신적 판결에 동의하라고 명하며, 헛된 부인으로 죄를 가중시키지 않도록 한다.

그는 아간을 ‘아들’이라고 부르되, 빈정거리거나 위선적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미 사형이 정해진 자를 대함에 있어 자신이 마치 아버지처럼 느꼈음을 선언한다. 이 예로써, 재판관들은 범죄를 처벌하면서도 인류애의 정서를 저버리지 않고 엄정함과 자비 사이의 균형을 지켜야 함을 배운다. 요컨대, 그들이 형을 선고할 때, 불필요한 온화함으로 정의의 엄정을 대신하지 않고, 피고에게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함을 가르친다.

많은 이들은 아첨 섞인 친절로 비참한 범죄자를 방심하게 하고, 마치 사면하려는 것처럼 가장한 뒤, 자백을 받아낸 후 갑작스레 집행자에게 넘기며, 피고는 면죄의 희망에 스스로 도취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범죄자를 이미 신 앞의 법정에 출두시켰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헛된 사면의 희망으로 그를 현혹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판결을 보다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다.


20절.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제 그는 너무나 놀라서 속임수를 쓰지도, 죄를 경감하려 하거나 그것을 좋게 보이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교묘하게 사건 전체를 상세히 밝힌다. 이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어떤 고문보다도 효과적으로 자백을 끌어냈다. 그러나 그가 보인 이러한 단순함이 반드시 참회의 확실한 표시라고 할 수는 없다. 마치 공포에 압도된 듯, 그는 기꺼이 숨기고자 했던 사실을 공개하였다. 또한 악인이 일정 기간 죄를 피하려 노력하고, 심지어 악행에 더욱 단단히 물들었을 때, 스스로 자백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는 진정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가운데 그들을 끌어내시고, 마치 몰아붙이듯 억지로 진술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서 드러난 공개적 진술은, 교활한 속임수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는 많은 이들의 위선을 정죄할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하였다”라는 표현은 강조를 담고 있다. 즉 사건의 각 부분을 차례대로 명확히 설명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단순히 행위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변명을 포기하고 핑계를 버림으로써 그 행위의 잔혹성에 관해 스스로를 정죄한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만약 신성모독을 의식하지 못했다면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는 결코 실수나 사려 부족을 가장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22절.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들을 보내매…… 사자들이 달려가며 신속히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순종을 나타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나, 여기서 언급된 신속함은 모든 사람이 속죄의 일을 가능한 한 신속히 완수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들이 “너희가 저주에서 정결하게 되기 전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리라”라는 엄한 경고로 인해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단순히 여호수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달린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주님을 달래고자 서둘렀다. 도둑질 당한 물건들이 그들의 눈앞에 놓였을 때, 이미 그들에게 닥친 치욕과 패배의 원인이 충분히 설명되었다.

그들이 적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은, 저주받은 물건으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소와 같은 도움을 받지 못했음을 의미했지만, 이제 도난당한 물건들을 목도함으로써 주께서 정당하게 그들에게 적대적이 되셨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온 가나안 땅의 첫 열매를 순결한 상태로 드리는 일을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지도 상기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관대함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이 가장 은밀한 곳까지 통하므로, 그 판단을 피하고자 아무리 숨기려 해도 헛된 일임을 배웠다.

24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아간은 두 가지 이유로 진 밖으로 인도되었다. 첫째, 집행으로 인해 오염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당한 형벌을 집행할지라도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도록 요구하셨다.) 둘째, 백성 가운데 어떠한 부정함도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형벌은 일반적으로 진 밖에서 집행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이 피 흘림에 대해 더욱 큰 혐오감을 갖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몸에 썩은 지체가 잘려 나가고, 진은 오염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본보기가 그 장소의 이름으로 남아 기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형벌의 엄격함에 마음이 흔들리고 거북해한다면, 항상 이 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즉,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판단에 반대할지라도, 신앙적 겸손과 절제로 우리의 건방짐을 제어해야 하며,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결코 거부해서는 안 된다. 젊은 자녀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잔인한 형벌을 당하며, 돌로 치고 불태워지는 것이 혹독하고, 더 나아가 잔혹하며 인간성을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동물들이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따라서 그 주인과 함께 정당하게 운명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간이 가진 모든 것은 그와 함께 소멸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녀들을 돌로 치고 불태우는 것은 여전히 잔혹한 복수처럼 보인다. 여기서 하나님은 에스겔서에서 밝힌 바와는 달리, 부모를 위하여 공적으로 자녀에게 형벌을 내리셨다. 그러나 어떻게 무죄한 자를 멸하지 않고, 아버지의 죄를 자녀에게 돌리시는지에 대해서는, 여리고 성의 전멸과 전 연령층에 대한 무차별 살육을 논할 때 이미 간단히 설명하였다. 그때 칼에 의해 죽은 유아와 어린이는 겉으로는 잘못이 없었으므로 부당하게 죽었다고 탄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이 인간의 지성을 훨씬 능가하여 사물의 심연까지 통찰하심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며, 건방짐과 지나친 교만으로 스스로 절벽으로 내달려서는 안 된다.

아간의 아들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결코 무모한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 손의 피조물이었으며, 할례라는 입양의 확실한 상징이 그들의 살에 새겨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형에 처하셨다. 이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불가해한 뜻에 복종하는 것밖에 없다. 어쩌면 죽음은 그들에게 약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불량자라면, 정죄는 결코 시기상조가 될 수 없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거두실 수 있으며, 그것이 질병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야생 짐승에게 붙잡혀 찢겨 죽고, 어떤 이는 독사에게 물려 목숨을 잃으며, 어떤 이는 물에 빠지고, 또 다른 이는 불에 빠지며, 또 한 사람은 유모에 의해 눌려 죽고, 다른 이는 떨어진 돌에 깔려 죽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이러한 모든 죽음이 하나님의 뜻 외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하나님의 조치를 문제 삼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어리석게도 이를 문제 삼는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죽게 하신 사람 외에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간의 소, 당나귀, 양의 수를 열거한 것으로 보아, 그는 충분히 부유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범죄가 가난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훔친 물건을 욕망한 것은 실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치와 탐욕을 위한 것이었음을, 즉 그의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25절. 여호수아가 이르되…… 이 격한 질책은 지나치게 가혹하게 보인다. 마치 불쌍한 사람을 광란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말한 듯하지만, 사실 그는 오히려 그에게 인내를 권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온 백성을 위한 유익한 본보기를 삼기 위함이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내 결론은, 아간을 절망에 빠뜨리려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 교회를 해치는 범죄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교만한 아간이, 자신이 충분히 속죄했다고 생각한 만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불평했을 수도 있으며, 이에 따라 여호수아가 그의 완강함을 바로잡거나 꺾기 위해 이렇게 신랄하게 꾸짖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질문은 일종의 탄원으로 보이며, 그가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아 간청할 때, 완강한 사람을 잠재우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온 백성이 돌을 던진 것은 범죄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일반적 표식으로, 자신들은 이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이를 증오한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돌무더기는 부분적으로 후세를 위한 기념으로, 또 한편으로는 만약 그 자리가 방치된다면 금이나 은의 조각을 함부로 주워 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이전에 주께서 여리고의 금을 바치도록 명하셨음에도, 절도한 물건의 수익으로 성소가 더럽혀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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