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여호수아 5장 with 칼빈주석
- 더빛교회

- 11월 19일
- 12분 분량
제 5 장
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1절. 요단 서쪽의…… 하나님의 두려운 능력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크게 놀라 공포로 정신을 잃을 정도였지만, 자기들의 악을 해결하려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녹았지만, 지혜와 힘이 부족하여 스스로 나서지 않았으며, 완강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전과 같이 완고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도 하나님과의 다툼을 멈추지 않으며, 쓰러질 때조차 하늘을 향해 거세게 저항함을 보았다. 따라서 주의와 경계로 나아가야 할 공포는 오히려 그들을 무모하게 재촉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위로부터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이미 꺾이고 놀라 공포에 빠진 상태임을 보고 더욱 담대하게 승리를 얻도록 하려 함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의 나약함을 아끼시어, 이미 원래 게으르고 겁이 많았던 그들에게 장애물을 제거함으로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적의 소문으로 인해 적은 공포에 사로잡혀 패주한 상태였다.
2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할례가 그렇게 오랫동안 등한시되어 왔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거의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날마다 경고와 권면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경건의 수련을 더욱 주의 깊게 실천해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할례는 그들이 받은 채택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극심한 고난 속에 억압을 받으며 신음할 때, 항상 자녀들을 할례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덟째 날이 지나도록 할례를 행치 아니하는 자를 반드시 징벌하겠다고 엄하게 경고하신 바를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이집트에서 그 의식을 소홀히 하였더라도, 당시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일종의 효력을 잃은 듯 보였으므로 그들의 부주의가 어느 정도 용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시 언약을 확실히 세우심으로 드러났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지 않은 것에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주석가들이 제시하는 변명은 전혀 의미가 없다. 나는 그들이 항상 무장 상태에 있었고, 언제 이동해야 할지 늘 불확실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도 여유가 없었고, 진이 곧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린 유아를 할례하는 것이 잔인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라 본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창세기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보다 더 큰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할례로 인해 생명이 위험했다면, 가장 바람직하고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명이 유아에게 치명적이 되도록 허용하셨을 리 없다. 요컨대, 위험을 두려워하여 생긴 생략은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불신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설령 유아들이 위험에 처할 것이 확실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에 받아들여진 언약의 표징은 백 명의 생명보다 귀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가 이러한 비겁한 행위를 허락했을 리 없는데, 만약 다른 동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게다가, 이 점은 의문이 남지만, 나는 그들이 출발한 첫날부터 자녀의 할례를 중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완고함으로 인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때 중단했다고 추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반역과 징벌이 정확히 표현된다. 즉, 유랑 중 끊임없는 장소 이동 때문에 이전에는 할례가 불가능했으므로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약속된 기업에서 스스로를 끊어버린 사악한 반역자들이 소멸될 때까지 40년이 경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된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이 온 세대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한 세대가 멸망할 때까지 광야를 방황했다는 사실이다. 내 견해로는, 이로부터 할례의 시행이 그 기간 내내 저주나 배척의 표시로 중단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형벌이 무고한 자에게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부모들이 자신을 통해 징계받는 것이 유익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분간 배척하신 것과 같은 의미였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손이 속된 사람이나 외인과 다르지 않음을 보면서, 스스로가 받을 만한 대우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그들이 정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은 즉시 은총 속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이고, 둘째, 그들 자신에게도 용서받을 희망이 남겨졌다는 점이다. 특히, 그들이 속되지 않은 민족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이유 외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다른 성례들도 박탈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배척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의 자손에게는 은총을 베푸시겠다고 선언하셨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손에게서 그들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저주의 상징을 보게 하는 것은 유익한 징벌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의 약속을 잠시 철회하시고, 그들의 죽음까지 마치 자물쇠로 잠가 두신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 징벌은 이후에 태어난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일시적 정지의 효과를 가지며,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할례를 연기하셔서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시고, 갱신할 기회를 기다리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누구든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이 터무니없다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통상적인 질서에 비추어 보아 그것이 그렇다고 인정한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입교된 자만이 유월절과 희생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성찬례도 세례로 교회에 입교된 자에게만 공통적으로 허용된다. 그러나 주님은 한동안 통상의 규칙을 바꾸셔서,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다른 거룩한 의식에 참여하도록 허용하실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백성은 한 가지 측면에서는 제약을 받았지만, 동시에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필요한 도움을 받았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화가 나 주먹을 들어 위협하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붙잡아 놓아, 위협과 매질로 놀라게 하면서도 결코 아들을 놓아주지 않는 것과 같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특별한 입양의 증표를 거두셨으면서도, 다른 성례는 그들에게서 거두지 않으신 이유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이 출발한 뒤 길에서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분명히 주장하는 구절이 있다고 반대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간결함을 위해 모든 사정을 정확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문맥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반역 후에 태어난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자손들을 세우셨고, 그 자손들은 여호수아에 의해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된 데서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때 새로운 백성이 만들어져서 완고한 반역자들을 대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백성을 할례시키기를 그들이 사방으로 적에게 포위된 뒤까지 미루신 것은 매우 엄하고 가혹한 시험이었다. 확실히,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바산 땅, 즉 주민들이 정복되어 평안이 확보된 땅에서 의식을 행했더라면 더 안전하고 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적의 한복판에 가두시고, 그들의 폭력과 욕망에 노출시키기까지 기다리신다. 이는 마치 일부러 죽음에 노출시키신 것과 같다. 왜냐하면, 부상으로 약해진 자들은 즉시 무너져 거의 저항 없이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슷한 상황에서 (창세기 34장) 야곱의 두 아들이 세겜 성으로 진입하여 주민을 살해하고 약탈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상처 입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주변 나라들이 공격하여 총체적 학살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쉬웠을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매우 엄격한 시험이었고, 그들이 이에 기꺼이 복종한 것은 더욱 큰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장소 자체는 신적 지혜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순종하는 마음을 더 잘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같은 명령이 요단강 건너편에서 주어졌다면, 그들은 낙심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다시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꺼리게 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진 것처럼 행운 속에서 땅을 점유하게 되었고, 단 한 장애물의 제거만으로도 전쟁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전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약속의 땅을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도 추가적인 동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이해했으며, 이는 그들의 할례받지 않은 상태가 거룩한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9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이집트의 수치는, 일부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무할례가 그들을 이집트인과 비슷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신성하지 않고 오점을 지닌 상태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마치 그들이 다시 이 표식으로 새롭게 찍혀 다른 나라의 부정한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만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뜻과 같다.
다른 이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이제 더 이상 이집트인에게 조롱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속였다는 의미로까지 확대해석된 것으로, 나는 이것이 지나치게 억지라고 단호히 거부한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들이 더 이상 그 나라의 신들을 숭배한다는 잘못된 비난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본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그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억압적인 비난으로 압도당하지 않도록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들이 다스림을 받던 왕에게서 멍에를 떨쳐내고 반역한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이 부당한 폭정을 응징하는 분이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단순히 자기 행위의 명목으로 사용했다고 비난하기 쉬웠다. 만약 할례라는 표시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미 애굽에 들어가기 전에 선택하신 사실이 없었다면, 그들은 도망자 혹은 반역자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옛 언약의 갱신을 통해, 그들이 정당한 권위에 반역한 것이 아니며, 무모하게 자의로 떠난 것이 아님이 분명히 드러났고, 그들의 자유가 하나님에 의해 회복되었음이 확증된 것이다.
치욕이 제거된 것으로 인해 그 장소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할례로 잘린 포피가 ‘길갈(Gilgal)’이라 불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불필요한 상상을 끌어들인다. 반면, 그 장소가 ‘굴러 떨어짐(Rolling Off)’이라 불린 것은 명백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부당하게 그들에게 덧씌워진 치욕을 굴러 떨어뜨리셨다는 의미이다. 요세푸스가 채택한 ‘자유(liberty)’의 해석은 헛되고 어리석으며, 그가 히브리어뿐 아니라 법률에도 무지했음을 드러낸다.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0~15)
10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월절을 지켰으며. 여기에서는 유월절이 정해진 날에 지켜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사용된 말투로 보아 관습이 평소와 달랐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할례와 마찬가지로 유월절도 40년 동안 중단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이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거룩한 절기에 참여하는 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제2년도가 시작된 후 유월절이 지켜졌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최근에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던 것(출애굽기 12:42)이 갑자기 버려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미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밤”이라고 말씀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세대에 걸쳐 지켜질 이 관습이 단 2년 만에 폐지되었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이겠는가! 또한, 최근 받은 은혜의 기억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묻어 버린다면 얼마나 무정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유월절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신비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유월절 제정 시에는 “할례 받지 않은 자는 먹지 못하리라”라고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답한 바 있듯이, 이는 특별한 특권이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이 율법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여전히 희생 제물을 드리고 율법의 다른 예배 규례를 지켰다는 점이다. 비록 이것이 율법상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일부 형식을 면제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막의 뜰에 부정한 자가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례받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곳에서 제물을 드렸으니, 사실상 유월절 희생을 행한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 규정상 허용되지 않은 일을 하나님이 관용으로 허락하신 셈이다.
모세가 유월절의 두 번째 거행(민수기 9장)을 언급한 것은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다. 즉, 첫 해가 끝날 때까지 거룩한 기념일을 지키지 않았던 백성들의 태만과 나태를 간접적으로 책망하기 위함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이 모든 세대에 걸쳐 매년 그들의 구원을 기념하도록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해가 끝나기 전까지 너무나도 망각에 젖어 있었고, 의무 수행에 게으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계시로 그들이 촉구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성들이 스스로 충분히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유월절의 사용이 이후로 중단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개연성으로 보아 매년 거행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주께서 연말 무렵에 미리 지시하심으로써, 앞으로 이를 철저히 준비하고 주어진 명령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11절.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그그들이 처음으로 밀로 만든 빵을 먹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개간되지 않은 땅이 아니라 비교적 비옥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 왕의 영토에는 주민들이 먹고 살만큼 곡물이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발견한 곡물을 단순히 방치하여 썩게 두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또한, 그들은 제사로 남은 고기를 먹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밀로 만든 빵을 끊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동시에 평소 먹던 음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체 백성을 부양하기에는 일부 지역만이 배정되었으므로, 충분한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모세가 단지 두 지파와 반 지파만 그 땅에 정착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열두 지파는 아직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고, 특히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에서는 농사를 지을 여유도 없었다. 이 때문에 만나가 그들에게 필요했고, 보다 풍부한 식량이 마련될 때까지 공급 역할을 했다. 이후 가나안 땅에서는 일반 음식을 다시 먹게 되었지만, 왜 그 시점까지 이를 미루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상처가 치유된 뒤 곡물을 수집하는 데 며칠이 필요했고, 종교적 규율상 안식일을 깨지 않기 위해 빵을 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안식일이 신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통해 볼 때 그들은 서둘러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이미 밀가루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루 만에 갈아 빻고 굽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가 요구되는 한 계속해서 양식을 공급해 주셨다. 만나가 갑자기, 바로 그 순간에 끊어진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한층 더 드러내는 증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만나가 단순히 구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같은 섭리에 의해 일시적으로 제공된 것임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전년도에 거둔 산물로 이해해야 함이 분명하며, 이에 대해 굳이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아직 제대로 익지 않은 올해의 수확물에 성급히 손을 댄다는 것은 지나친 성급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백성을 부양하기 위해 한 달만으로는 충분한 양을 수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왜 해설자들이 이렇게 명백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애쓰며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13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여여기 우리는 여호수아에게 큰 격려와 담력을 준 놀라운 환상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비록 그가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지만, 추가적인 자극의 제공이 결코 무익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난 것은 오직 그의 개인적인 사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의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장래 세대를 위해서도 더 확실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증거를 마련하고자 하셨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 손에 의해 거룩한 땅에 심겨졌음을 당당히 자랑했지만,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그곳에 배치되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모든 세대에 유익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되었음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눈을 들어 올렸다”라는 표현은, 혹시 누군가가 단지 순간적인 환상에 눈이 어지러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 환상의 확실성을 확인하는 데 기여한다.
처음 그 광경이 나타났을 때, 분명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그때 혼자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가 기도하기 위해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났든, 혹은 성을 정찰하기 위해 따로 나갔든 간에 말이다.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데, 즉 다른 사람들의 의욕을 꺾을 수 있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성을 어디서 공격해야 할지 살피러 나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그는 수행원 없이 혼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직 그만이 환상을 인지하였다. 만약 적을 만났다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사람에게 묻듯 질문을 던지는데, 그 답변을 통해서야 자신이 마주한 존재가 천사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의심은 환상의 신빙성을 더하며, 점차 그가 인간으로 보았던 존재가 천사임을 인식하게 이끈다. 동시에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이 천사가 평범한 천사가 아니라 특별한 탁월함을 가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는 스스로를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 부르는데, 이는 단순히 택하신 백성만이 아니라 천사들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견해가 더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례 없는 일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이전에 모세에게 행하신 일을 그대로 구성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세 자신이 이 은혜를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겼음을 안다. 이는 정당한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을 공개적이고 친숙하게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무차별적으로 천사라 불리며,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칭호로 구별된다. 바울 또한 이에 대해 충분한 증인으로서, 그것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언한다(고린도전서 10:4). 모세 자신도 중보자의 인격 안에서 임재한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이는 금송아지를 만든 후 하나님께서(출애굽기 33:2~3) 더 이상 백성의 인도자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실 때, 동시에 한 명의 천사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과 같다. 단, 그 천사는 천사 군단 전체에서 특별히 선택된 것과 같았다. 모세가 이를 간절히 사양한 것은, 중보자가 제거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익숙하게 여긴 교회의 대장과 우두머리가 지금 도움을 주기 위해 임재함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보증이 된 것이다. 실제로 신적 채택(divine adoption)은 중보자의 손을 통해서만 확증될 수 있었다.
14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비록 그 부정(否定)은 질문의 두 부분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되어 — 즉, 그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가나안 사람도 아니며, 따라서 필멸의 인간이 아니라는 부정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 그것은 오히려 두 번째 부분, 곧 여호수아가 “당신이 우리의 대적 중 하나이냐?”라고 물은 부분에 더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그가 스스로를 “여호와의 군대”라 명예롭게 부른 택하신 백성 위에 군림하러 온 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로 나타낸 것은 인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을 드러내지만, 본질의 일체성(unity of essence)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세의 책들에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종종 “주재하는 천사”(presiding Angel)에게 귀속되는 것을 이미 언급했는데, 이 천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지만, 중보자의 인격(persona) 안에서 경륜상(dispensation)에 따라 하나님보다 낮은 위치에 계신다. 나는 고대의 저자들이 이 주제에 관해 가르친 바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 즉, 그리스도께서 옛날에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던 것은, 후일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신”(the manifestation of God in the flesh) 신비에 대한 예표(prelude)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성육신하셨다고 상상하는 잘못을 피해야 한다. 첫째로,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때가 차기 전에 그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셨다고 읽을 수 없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한, 다윗의 자손이 되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스겔 1장)에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단지 “사람의 모양”(a likeness of man)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실체적인 몸(substantial body)이었는지, 아니면 외형적 형상(outward form)이었는지는 논의할 필요가 없으며, 이 문제에 대해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로 보인다.
남은 유일한 문제는, 주님의 군대의 장관이 이제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미 맡겨진 백성을 버린 적이 없고, 최근에는 요단강을 건널 때 자신의 임재를 탁월하게 나타낸 바 있음에도 그렇다. 그러나 성경의 일반적인 용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실 때는 실제로 그분의 도움을 경험함으로써 인식될 때를 의미하며, 경험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멀게 느껴진다. 따라서 여기서 그분이 “오는 것”은, 곧 진행될 전투에서 도움을 제공하시겠다는 의미와 같으며, 그분의 출현으로 전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과 같다.
여호수아가 드린 경배로부터 그가 그리스도를 분명히 인식하고 경배했는지를 확실히 추론할 수는 없으나, “나의 주님께서 종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묻는 것을 통해,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권능과 권위를 그분에게 귀속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비전을 더욱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위대한 천사는 존경과 경외의 표시로 여호수아가 신을 벗을 것을 요구한다. 모세는(출애굽기 3:5) 시내산에서 자신에게 동일한 명령이 내려졌음을 전하며, 이는 오직 주께서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장소가 다른 곳보다 더 거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하실 때뿐이다. 따라서 야곱이(창세기 28:17)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알게 된 그 곳을 “하나님의 집이요, 두려운 곳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외친 것과 같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종에게 신을 벗으라 명하실 때, 여호수아는 이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실제 임재를 확인하고, 비전의 무게를 더한다. 이는 발을 드러내는 것이 그 자체로 하나님 경배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이 이러한 도움을 필요로 하여 경외심을 더 잘 불러일으키고 준비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로 그가 나타나는 장소를 거룩하게 하시는 만큼, “거룩한 땅”이라는 표현은 부분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가나안 땅의 탁월함을 칭찬하는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이 땅은 하나님의 거처이자 순수한 경배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구절에서 이 땅을 “그의 안식처”라고 부른다(시편 95:11, 132:14). 이 절의 마지막에서 여호수아가 순종함으로써 칭찬받는 것은, 후세가 그의 본을 따라 그 땅에서 순수한 경건을 기르도록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가나안 땅이 다른 모든 나라보다 높이 찬양되는, 일종의 암묵적 비교나 대조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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