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여호수아 3장 with 칼빈주석
- 더빛교회

- 11월 13일
- 8분 분량
3장
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1절.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 우리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이 돌아온 다음 날까지는 진을 옮기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뒤, 그는 장관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그릇을 거두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삼일 후에 요단을 건너게 될 것임을 알렸다. 그러므로 그가 아침에 일어났다는 표현은 단순히 정탐꾼들의 귀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포고가 선포된 시점을 의미한다. 3일이 지나자, 장관들은 다시 진영을 돌며 백성들에게 통과 방법을 알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언급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길을 열어 줄 것인지가 공적으로 알려지기 전, 강가에 모인 무리들은 어느 정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물론 요단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때 물은 범람하여 불어나 있었기 때문에, 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통과를 막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여성과 어린이, 짐과 동물들을 모두 강 건너편으로 옮길 수 있다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겉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들이 의연히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은, 의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충실한 순종의 본보기가 된다. 이는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반항하며 주님과 모세를 원망하던 그들의 조상들과는 현저히 다른 태도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2절. 사흘 후에 …… 그것은 곧 그들의 출발이 예고된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그들이 강둑에서 밤을 샌 것은 하룻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너기로 정해진 기간이 사흘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이제 그들에게 장애물과 어려움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주목하라고 권고한다.
비록 기적의 형태가 아직 설명되지 않았지만, 언약궤가 길을 인도하는 깃발처럼 앞장서서 나아갈 때, 주님께서 무언가 비범한 일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추론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이 불안감 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의 믿음은 심각한 시련을 통해 다시 시험받는다. 그들이 결과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언약궤를 따르는 것은 실로 희귀한 미덕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4절.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 젊은 레위인들, 즉 궤를 운반하는 직무를 맡은 자들(민수기 4:15)은 궤를 만지거나 덮개가 벗겨진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었으므로, 일반 백성들이 궤에 상당한 거리 이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자신과 궤 사이에 넓은 간격을 두어 경외심을 나타내도록 명령받음으로써 궤의 위엄이 선포된다.
또한 우리는 웃사(사무엘하 6장)가 말을 제어하지 못한 소들이 궤를 흔들자, 생각 없는 열정으로 손을 내밀어 궤를 받친 일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밀하게 초대하시지만, 충실한 신뢰는 결코 안전과 담대함을 낳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두려움과 함께 수반된다.
이와 같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강력하고 기쁜 표징이었지만, 동시에 육신의 교만을 누르기에 알맞은 두려운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겸손과 절제는 또한 신앙을 단련시키는 효과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은혜를 지나치게 좁은 범위 안에 가두지 못하게 하고, 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항상 가까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5절.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 하나님의 도우심을 나타내는 어떤 비범한 능력의 표징이 반드시 드러나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머뭇거림에서 오는 지체로 인해 일이 늦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아직 그 기적의 구체적인 성격을 명백히 밝히지 않는다. 물론, 바로 이어지는 구절을 같은 문맥 속에서 읽는다면 그가 이미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믿음의 진정한 시험이 드러난다. 곧, 하나님의 뜻에 기대되, 그분이 어떻게 행하실지 또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지나치게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어 단어 “קדש”(qādash, 칼빈이 라틴 문자로 sdq라 표기함)는 ‘준비하다’(prepare)라는 뜻으로도, ‘거룩하게 하다’(sanctify)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두 의미 모두 적절하므로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할 준비를 하게 하며,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다 가까이 자신을 나타내시던 시대에는 그분의 임재를 맞이하기 위해 엄숙한 의식을 통해 자신을 성결케 하였다. 모세가 율법을 반포할 때 백성을 성결하게 하였던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
일부 주석가들은 백성이 부정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유가 단지 요단을 건너는 일을 방해할 만한 어떤 장애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만, 이는 지나치게 협소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6절.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 하나님께서 언약궤가 앞서 가게 하신 뜻을 제사장들에게 미리 알리셨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야 그들이 그 명령을 보다 기꺼이 실행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곧 백성 전체에게도 물이 갈라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알려졌다. 이미 진중에서 관리들이 “백성은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명령을 공포했으므로,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인도자이자 기수(旗手)를 잡는 자들, 즉 행렬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점을 이미 통보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여호수아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제사장보다 평민들에게 먼저 더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이어서 백성에게도 그 기적이 알려졌다고 덧붙여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제사장들도 한동안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상태로 머물렀다가, 주께서 그들의 전적인 순종을 확인하신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행하실 일을 공개적으로 밝히셨다는 것이다.
먼저, 본문은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백성 앞에서 언약궤를 메라”고 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혹시 누군가 여호수아가 아무 근거 없이 무모하게 이런 일을 시도한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여,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 명령을 확증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덧붙여 언급한다.
비록 이때에는 요단강의 흐름이 끊길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한 말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자세히 자신의 계획을 밝히셨음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직접 들은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임의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이 일을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이제 하려는 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함을 미리 밝히고 있다.
10절. …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여호수아는 이 기적의 능력이 단순히 땅의 입구에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이는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단지 적대적인 영토로 들어가는 길만 열어 주시고, 그 뒤로는 물러설 길을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사실상 죽음에 내맡긴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좁은 지형 속에서 길을 잃고 쉽게 전멸했을 수도 있고, 혹은 굶주림과 모든 보급의 결핍 속에서 생명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미리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강을 본래의 흐름으로 되돌리실 때, 그것은 곧 그분이 손을 펴서 그 땅의 모든 주민들을 쫓아내시는 행위와 다름없다고. 다시 말해, 요단을 건너는 그 기적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그 모든 민족을 제압하게 될 승리의 확실한 전조(前兆)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로 말미암아 너희가 주께서 너희 가운데 계심을 알리라” 하였는데, 그 목적은 무엇인가? 단지 가나안 땅에 발을 디디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민족들을 무찌른다는 언급 속에는 이미 자유롭고 평안한 최종적인 소유가 암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요단을 가르심으로써 자기의 권능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셨을 때, 백성 또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우심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원수들이 이미 패하여 쓰러져 있는 모습을 눈앞에 본 것과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시작하신 일을 중도에 버리시지 않는다. (시편 138:8) 그분이 자기 백성을 약속의 기업으로 인도하실 때, 요단의 흐름을 끊어 마른 길을 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그 한순간의 기적에서 멈추고, 그 이후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었겠는가!
이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한다. 곧, 하나님의 여러 선행(善行)을 우리의 궁극적 구원과 지혜롭게 결합하여, 그분의 은혜로운 시작이 장차 완성될 구원의 희망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근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 기적을 통해 너희가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심을 알리라”고 말할 때, 그는 간접적으로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순한 약속만으로도 충분한 확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지지 않은 믿음은 언제나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록 믿음은 본래 오직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에만 기대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험적 지식이 연약한 믿음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행위로써 인치시며,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주실 때마다, 그것들을 그가 하신 말씀의 확증과 우리의 의심을 억누르기 위한 도움으로 사용하신다.
11절. 보라 …… 주의 언약궤가 …… 먼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백성보다 앞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그 목적을 설명한다. 곧, 요단강이 주의 임재 앞에서 떨며 그 자리에서 물러가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 114편의 말씀처럼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이 물러갔도다”라는 시적 표현을 연상시킨다.
이때 열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삽입적인(부가적인) 설명으로,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게 될 내용을 잠시 암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단지 이 사실만 이해하면 된다. - 곧, 언약궤가 앞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궤를 통하여 백성을 인도하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이로써 율법에 따라 정해진 예배의 거룩함이 확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가 단지 상징적인 장식물이나 빈 껍데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 임재를 두신 표징임을 보았다. 요단강은 마치 하나님의 위엄을 눈으로 본 듯이,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여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언약궤를 통하여 은혜를 나타내신 유일한 이유는, 그 안에 언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궤는 하나님의 언약(말씀)을 담고 있었기에 능력의 통로가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쉽게 믿기 어려웠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백성의 마음을 모든 어려움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묵상으로 이끈다.
이때 하나님께 붙여진 “온 땅의 주(主)”라는 칭호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 만물의 모든 요소 위에 군림하심을 높이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와 강 같은 물질적인 피조물들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복종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이 비록 본성상 흐르는 성질을 가졌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굳게 멈출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15절. 궤를 멘 자들이…… 제사장들이 과감히 강바닥을 넘어 물속으로 들어간 용맹함은 많은 칭찬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즉시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발을 들이는 순간, 깊은 웅덩이에 빠져 모두 휩쓸릴 것이라는 예상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흐르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정된 위치까지 흔들림 없이 나아감으로써, 신뢰에 기반한 드문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위험 외에도 특수한 위험이 있었다. 요단강은 여름 초기에 항상 범람하곤 했기 때문이다. 평야가 물에 덮여 강둑이나 여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진흙이 넓게 펼쳐져 있어 두려움과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하나님은 백성, 특히 제사장들이 이러한 장애물과 맞서 싸우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과 견고함이 더욱 빛나도록 하셨다.
동시에, 이러한 어려움은 기적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범람했던 강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물러나 한곳에 쌓여 마른 언덕처럼 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자연적 현상이나 우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먼저 이 기적의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의심을 제거하고, 속임수를 써서 하나님의 개입을 부인하려는 불경한 자들을 방지하였다.
물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일부 구간이 마른 것처럼 보이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물이 한 곳에 모여 쌓이는 장면은 결코 자연적이거나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 연속적인 배출구를 찾던 강물이 멈춰 서서 쌓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놀라운 광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받아들여졌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더욱 뚜렷이 깨닫게 되었다. 쌓인 물더미는 사실상, 만약 강물이 본래대로 흐르기만 했다면 백성 전체가 묻혔을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들이 물 위를 걸었다면, 그들의 믿음이 일종의 다리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머리 위로 거대한 물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찾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이 장소가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하도록 표시된 것도, 그 기억이 영원히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돌을 세워 영구적인 기념물로 삼게 하셨는데, 이는 이 특별한 은혜가 후세에도 세대를 거쳐 기념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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