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성경연구] 여호수아 2장 with 칼빈주석

2장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가만히)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1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번에 행해진 정탐의 목적은 이전과 달랐다. 그때는 여호수아가 다른 열한 사람과 함께 가나안 전 지역을 탐사하여 그 땅의 위치, 성격, 비옥함, 도시의 규모와 수, 거주민의 풍속 등을 백성에게 보고하게 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정탐의 목적은 백성 중 주저하는 자들을 독려하여 더욱 신속히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명기 1장 22절에 따르면 모세가 백성의 요청으로 사람들을 뽑아 그 땅을 정탐하게 했다고 되어 있으나, 민수기 13장 4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열두 명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그 임무는 가나안의 전 지역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 아름다움을 전하여 백성의 용기를 북돋는 데 있었다.

이와 달리 여호수아는 비밀리에 두 사람을 보냈다. 그 이유는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통로가 있는지, 여리고 사람들이 방심해 있는지 혹은 방어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위험에 대비할 정보를 얻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그의 행동을 현명한 신중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과도한 염려로 볼 것인가? 특히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정탐꾼을 보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여호수아에게 “백성에게 요단을 건널 준비를 시키라”고 명하셨다는 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 없이 진영을 움직였을 리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정탐꾼을 보낼 때도 하나님께 뜻을 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혹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확인 과정이 필요함을 직접 감동으로 알려주셨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은 그 성을 이미 함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어디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지 탐색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기생의 집에 들어가 …… 어떤 이들이 ‘기생’이라는 이름을 피하고, זֹנָה(조나 ; 매춘부)를 ‘여관 주인(innkeeper)’이라 해석하려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들은 여호수아의 사자들이 창녀의 집에 묵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지거나, 혹은 그 여인이 단지 사자들을 호의로 맞아들였을 뿐 아니라, 특별한 용기와 슬기로 그들의 안전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녀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유대 랍비들의 관행과 다르지 않다. 랍비들은 자기 민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성경에 다소 불명예스럽게 보이는 대목이 있을 때마다 임의로 억지 해석을 덧붙이고, 꾸며낸 이야기로 본래의 뜻을 왜곡하곤 했다.

그럼에도 더 합리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정탐꾼들이 비밀리에 행동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공공장소나 왕래가 잦은 곳을 피하려 했을 것이므로, 그들은 성벽 가까운 외진 곳에 살던 한 여인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합의 집은 성벽과 맞닿아 있었고, 그 바깥쪽은 성벽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곧 그녀의 집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거리와는 동떨어진, 한적하고 은밀한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런 유형의 여성들은 보통 좁은 골목이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거주하곤 하므로, 그녀의 집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공 여관이었을 리는 없다. 만약 여관이었다면 정탐꾼들이 자유롭게 대화하거나 몸을 숨기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들은 몰래 들어가 곧바로 은신처를 찾았다. 게다가, 수치스러운 생업으로 살아가던 여인이 곧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 은혜는 수치의 자리까지 파고들어, 그 속에서 라합뿐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와 온 가족을 구원해 내셨다. 분명히 말하건대, 히브리어 단어 (זֹנָה, zonah) 는 거의 언제나 ‘기생(창녀)’을 의미하며, 여기서 굳이 전통적인 뜻을 버릴 이유는 전혀 없다.

2절.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아마도 의심스러운 낯선 자들을 살피기 위하여 감시인들이 임명되었을 것이다. 이는 위급한 시기나 전쟁의 위험이 임박한 때에 통상 행해지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가까이 이르렀고, 에돔과 모압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처를 구하려 한다고 공공연히 알렸다. 그들은 수적으로 강력하였고, 이미 인근의 두 왕을 쳐서 큰 정복을 이루었으며, 곧 보게 되겠지만, 홍해를 건넌 그 기적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명백한 위험 속에서, 여리고 성 -곧 국경에 위치한 도시- 에 어떤 낯선 이라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나태성을 보이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출처가 불분명하고, 여러 정황상 적대적 목적을 가진 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왕에게 고발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초자연적으로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성문을 지켰더라면, 정탐꾼들은 들어오자마자 쉽게 체포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연히 즉시 수색이 시행되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정탐꾼들이 피신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여리고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심판적 혼미(judicial amazement) 속에서,

모든 일을 무질서하고 무계획적으로 행하였다. 그동안 두 정탐꾼은 거의 잡혀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왕은 그들을 체포하려 사람을 보냈고, 그들은 한 여인의 집에 숨어 있었으며, 그들의 생명은 오직 한 여인의 입술, 곧 한마디 말에 달려 있었다 - 마치 생명이 실오라기 하나에 매달린 듯한 처지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요단을 담대히 건너지 못한 불신앙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건의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정탐꾼들을 극도의 위험 속에서 구원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분은 그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그들의 안전을 친히 지켜보시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섭리를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4절.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우리는 라합이 정탐꾼들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그들의 도착 소문이 퍼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그들을 숨길 수 있는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왕의 명령을 받자마자 숨기려 했다면,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부인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녀가 침착하게 거짓말을 꾸며낼 용기를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미리 손님들을 숨겨 놓았고, 이제 수색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대담하게 나서서 교묘한 대답으로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라합이 자기 나라를 배반한 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 둘째, 그녀의 거짓말이 결백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에 대한 사랑, 즉 마치 공동의 어머니와도 같은 조국에 대한 본능적 애정이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심겨 있음을 안다. 그런데 라합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가 멸망당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정탐꾼들에게 도움과 조언을 주었다. 이는 극히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행위처럼 보인다. “아직 적이 아니므로 괜찮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 도시의 주민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공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합이 그녀의 행위에 결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특별한 지식을 주셨기 때문이며, 그녀는 일반적인 도덕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두 사도에 의해 칭찬된다.(히브리서 11:31, 야고보서 2:25) 즉, 그녀가 정탐꾼을 도운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주께서 외국 여성을 자기 백성에게로 옮기시고, 교회의 몸에 접붙이시기로 하셨을 때, 그녀를 불경하고 저주받은 민족으로부터 분리하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녀가 그 날까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속해 있었지만, 교회의 몸에 입양될 때, 그녀의 새로운 신분은 시민들이 서로에게 속박되는 일반 법으로부터의 일종의 해방이었다. 요컨대, 믿음으로 새 백성에게 나아가기 위해, 그녀는 자기 나라 사람들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 일에서 그녀가 단지 하나님의 판단에 순응했을 뿐이므로, 그들을 버리는 데 어떤 범죄성도 없었다.

거짓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이 선한 목적을 위하여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결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른바 의로운 거짓말을 전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리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이 형제를 돕고,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며, 그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합법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은 옳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의 행위가 순전히 결점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미덕의 칭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성도들이 올바른 길을 따르려 노력할 때, 종종 우회적인 경로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8장에서 리브가가 자기 아들 야곱에게 축복을 주도록 한 일에서, 그녀는 예언을 따랐다. 이러한 순종에서 경건하고 칭찬할 만한 열심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녀가 야곱을 에서 대신에 세움으로써 의무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 교활한 행위는 본래 칭찬받을 만한 행위에 어느 정도 흠을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잘못이 그 행위의 거룩한 열심이라는 공적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잘못은 억제되어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합도 사자들이 떠났다고 거짓으로 말할 때 잘못을 범하지만, 주된 행위는 하나님께 합당하였으니, 선과 함께 섞인 악은 책임으로 돌려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들의 생명을 거짓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셨다.


7절. 그 사람들은…까지 쫓아갔고…… 그들의 지극한 쉽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눈멀게 하셨음을 보여 준다. 라합이 그들을 속여 많은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불안의 과정이 이어진다. 성문이 닫히고 도시가 감옥과 같이 되어 탈출의 희망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중대한 시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촉발되었다. 이 역사가 그들의 보고를 통해 기록되었음을 볼 때, 그들이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그들을 연속된 위험에 노출시키셨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여전히 깨어 있었음으로 보아, 불안과 공포 속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의 출구가 봉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두려움과 긴장은 상당히 커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라합은 전혀 겁먹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차분하게 협상을 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침착함과 단호함 속에서, 다른 곳에서도 칭찬받는 그녀의 믿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그녀가 왕과 백성의 분노를 감히 무릅쓰고, 반쯤 공포에 질린 손님들에게 간청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와 히브리서 저자가 그녀에게 내린 찬사(약 2:25, 히 11:31)를 보고, 그녀를 믿음 있는 자들의 목록에 올린 것이 어딘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활발하고 생생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나무가 그 열매로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우리는 보통의 결과가 아닌, 믿음의 여러 증거들을 볼 수 있다.

둘째, 그녀가 주변 나라들이 이미 사실상 굴복하고 무릎 꿇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경건한 원칙(piety)의 영향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내진 공포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물론 세속 작가들에게서도 비슷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원하시는 대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들이 앵무새처럼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는 것과 달리, 라합은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정하셨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는 모든 주민들이 그들 앞에서 겁에 질려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고백에서 라합은 인간의 마음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의 최고 통치권을 인정하는데, 이는 세상의 교만이 부정하는 권세이다.

비록 모든 시대의 경험이 보여 주듯, 더 많은 군대가 적의 힘과 무용보다도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공포에 의해 무너지고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인식은 곧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정복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용맹을 치켜세우고, 성과가 있을 때는 오직 자신의 노력과 전쟁 재능을 자랑해 왔다. 그들이 때때로 대담함과 용기가 외부 요인에 의해 주어지거나 제한된다는 것은 인정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전쟁에서 운이 크게 작용하거나 심지어 지배한다고 고백하며, 공포와 관련하여 속담을 만들고, 공포의 신(Pavor)와 안정의 신 주피터 스타토르(Jupiter Stator)에게 제물을 바쳤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 깊이, 모든 사람의 용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재의 용기를 부여하셨는지 여부에 따라, 겁은 하나님께서 그의 대담함을 억제하셨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

반면 라합은 가나안의 민족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그들이 마치 미리 자신의 멸망을 선언하는 듯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스라엘 자손이 불러일으킨 공포가 승리의 전조임을 추론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지도자로 삼아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의 간담이 이렇게 녹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망적인 완강함으로 저항을 준비했다. 이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악인이 깨지고 부서질 때, 그들이 완전히 복종하여 멍에를 받기보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길들여지지 못함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공포 속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라합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찰할 수 있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두려워했지만, 자신이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음을 깨닫고, 오직 겸손하고 평온하게 복종함으로 악을 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결론 내린다. 저항은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땅의 모든 불쌍한 주민들은 어떤가? 그들은 공포에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완고함은 굴복하지 않고 서로를 부추기며 싸움에 나선다.


10절. 이는 … 우리가 들었음이라…… 그녀는 특히 공포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금까지 전례 없는 기적들이 널리 퍼진 소문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홍해가 기적적으로 갈라진 길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물이 본래의 성질을 변화시켜 단단한 더미로 쌓이지 않았다면, 자연의 창조자인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따라서 이 요소의 변형은 분명히 하나님이 백성 편에 계시며, 그들에게 바닷속을 마른 길로 지나가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한 옥과 바산에서 거둔 눈에 띄는 승리들은 정당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여겨졌다. 후자의 결론은 단지 추측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홍해의 통과는 확실하고 논박할 수 없는 증거였다.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손을 내미신 것처럼 확실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 원정에서 하나님이 주된 지도자라는 확신으로 사로잡혔고, 그리하여 그들의 공포와 혼비백산이 발생했다.

동시에, 그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집트 신들보다 우월하다는 헛된 상상에 속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시인들이 각 신이 특정 민족을 보호하고 다른 민족과 전쟁을 벌인다고 꾸며내며, 신들 간에도 갈등이 일어난다고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라합의 믿음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최고 권능과 영원을 가지신 분으로 인정한다. 이것이 곧 여호와의 진정한 속성이다. 그녀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신들의 무리 중 한 존재가 이스라엘을 돕고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인정하며, 그분이 진정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고백한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정보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그 정보를 적용함에 있어 자기 민족 사람들을 훨씬 능가하는 통찰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11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라합의 믿음의 형상이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나타나는데, 그녀는 모든 우상을 무너뜨리며 하늘과 땅의 통치를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만 귀속시킨다. 이는 하늘과 땅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선언될 때,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영광을 여러 신들 사이에 나누어 분배하는 모든 이교적 허구를 거부하는 것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두 사도께서 라합의 행위를 믿음이라는 칭호로 존중한 것은 결코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일부 교만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은 이를 비웃지만, 나는 그들이 유일한 참 하나님을 모든 허구의 신들과 구별하고, 동시에 그의 권능을 찬양하며 온 세상이 그의 뜻대로 다스려진다고 선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하기를 바란다. 라합은 주저하며 말하지 않고, 절대적인 언어로 존재하는 모든 권능이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있으며, 그가 모든 요소를 지배하고, 위와 아래의 모든 것을 명령하며, 인간사의 모든 일을 결정한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믿음이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아직 그녀의 영원한 구원에 충분하지 않은 경건의 싹에 불과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지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비록 연약하고 미약하더라도, 자신을 그의 권능에 맡김으로써 그녀의 선택됨을 증명하며, 그 씨앗에서 나중에 완전한 성장에 이르는 믿음이 발아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12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 또한 그녀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확실히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여긴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녀가 이 결론에 도달한 근거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땅을 약속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라합은 하나님이 불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침범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방종을 일삼는 침략자들을 도와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오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땅의 통치를 맡기셨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이 에돔 사람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길을 물을 때 어디로 가려는지 전혀 말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민족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약속은 에서가 배제됨으로써 다시 상기되었던 기억이었다.

더 나아가, 라합의 말 속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 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볼 수 있는 시각’이라고 묘사한 특징을 볼 수 있다(히 11:1). 라합은 자신의 백성과 함께 요새화된 도시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겁에 질린 손님들(이스라엘 정탐꾼)의 생명을 맡긴다. 마치 그들이 이미 땅을 차지했고, 원하는 대로 살릴 수도, 해칠 수도 있는 전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 자발적인 항복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그분의 보호 아래 두는 것과 동일하다. 게다가 그녀는 서약을 요구하는데, 이는 종종 성읍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싸움의 혼란과 격렬함 때문에 의무의 기억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녀는 자신이 베푼 친절을 언급하는데, 이는 감사가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이행하도록 더욱 자극하게 하기 위함이다. 서약의 의무 자체가 충분히 효과적이었어야 하지만, 구출을 받은 손님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이중으로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라합은 자신의 부모와 친족에 대한 염려에서 그녀의 온화한 성품을 보여 준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녀가 자신의 목숨을 부모의 희생으로 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용기와 열의를 발휘해 부모를 구하려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14절.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그들은 라합을 충실히 구하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죽음을 청하는 셈이다. 일부 해석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맹세하겠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거나 제한적으로 느껴지는데, 그들의 의도는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묶겠다(bind themselves before God)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라합에게 어떤 해가 그들의 태만으로 인해 닥치면, 그들은 일종의 속죄적 희생물이 되는 셈이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라합의 부모와 형제, 자매까지 확장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라합의 가족이 안전하지 않다면, 자신의 생명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태로 자신을 묶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서약의 신성함이 나타난다. 비록 그 위반이 사람에게는 면죄될 수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개입하셨기 때문에 배신은 반드시 심판받는다. 히브리어에서 “자비와 진리를 행하다”라는 말은 곧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고 진지하며 확고하게 수행하는 것과 동등하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첨가되었는데, 라합이 그들이 말한 내용을 누설하지 않을 경우이다. 이는 흔히 해석되는 바와 달리 불신 때문이 아니라, 라합 자신의 안전을 위해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이 경고는 선의에서 비롯되었으며, 순수한 호의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라합이 자신을 폭로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이 은밀하게 처리되어야 함을 보여주며, 여성이 경솔하게 약속 내용을 말하여 사형에 처해지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라합의 안전을 진심으로 염려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무도 집을 떠나지 말라고 명확히 규정하면서, 그 외의 경우 책임을 면하게 한 점에서, 서약을 할 때 신중함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으며, 헛된 약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라합이 산으로 피신하여 사흘간 조용히 있으라고 조언한 것은, 믿음과 명백한 위험에 대한 예방책 사이에는 모순이 없음을 보여 준다. 사신들이 큰 두려움 속에서 산으로 숨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간섭을 하셨다는 신뢰가 그들의 발걸음을 안내했으며, 마음을 잃지 않게 했다.

일부 사람들은 질문을 제기했다. 성벽을 넘는 것이 범죄라면, 창문을 통해 도시를 벗어나는 것이 합법적일 수 있는가? 그러나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도시의 성벽이 어디서나 신성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든 도시가 로물루스 같은 존재를 가진 것은 아니어서, 성벽을 넘는 것이 형제를 살해할 구실이 되지는 않았다. 둘째, 키케로가 상기시키듯이, 법은 형평성에 따라 완화되어야 한다. 즉,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넘는 사람은 처벌보다는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법의 목적은 시민이 성벽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솔, 분노, 사기, 난폭함 없이 필연적인 상황에서 성벽을 넘는 자는, 이 때문에 사형에 처해질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나쁜 선례가 된다고 반론이 제기된다면, 동의한다. 그러나 생명을 해치거나 폭력, 강도에서 구하려는 목적이라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행한 경우 필연성이 이를 정당화한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생명이 위험할 때, 바구니에 매달려 내려간 것이 범죄로 간주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악인들의 폭력과 잔인함에서 혼란 없이 구하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24절.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 이 구절은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선정하는 데 있어 잘못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언사는 그들이 올곧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로서 드문 정직성을 가진 자들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때 겪었던 공포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면, 온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을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위험에서 벗어나고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되새기며, 여호수아와 백성에게 담대히 전진할 것을 권면한다.

비록 단순히 땅을 소유하리라는 약속만으로도 충분했어야 하지만, 주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지극히 너그러이 돌보셔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약속하신 바를 실제로 경험으로 확인시키신다. 주께서 헛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님은, 이미 열방이 두려움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하고, 마치 말벌을 보내듯 몰아내심으로써 입증된다. 그들은 라합이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에게 땅이 주어진 것은 거주민들이 두려움으로 거의 기절할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논한다. 이에 나는 논리적 연결사 ‘for’를 사용하였으나, 문자적 의미는 ‘그리고 또한(and also)’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들이 말한 바가 실제 경험으로 확인되었음을 충분히 드러낸다. 그리고 사실 그 민족들은 마치 하나님의 손길로 일망타진된 것처럼 모두들 간담이 녹아 있었다.


 
 
 

댓글


Contact Us.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61  |  office@thevit.org  |  Tel: 031-272-7822 ㅣ FAX: 031-217-7822

  • White Facebook Icon
  • White YouTube Icon
  • White SoundCloud Ico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