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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05 QT묵상 (시 51편)_이찬우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하게 참회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뉘우침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죄인됨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그는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생활을 할 적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비록 그가 시편51편이 기록되는 시점에서 크게 범죄했었다 할지라도, 이전의 그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어지간한 사람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경건한 삶을 살았다거나 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한번만 봐달라는 식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오직 철저하게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며 참된 용서는 내 자신의 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죄인 됨을 알지 못한 자는 죄 용서를 받아도 그것에 대한 기쁨이나 감사, 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앞에서의 내 모습이다.

오늘의 내 삶에서 나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회사에서 바쁘게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 중 제대로 되지 않은 어떤 한 가지에 대해 지적을 당하면 ‘왜 내가 잘한 것에 대해서는 봐주지 않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종종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기분이 나쁠 때도 있었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태도가 내가 진짜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다. 기도를 하면서 매번 실패하는 삶을 사는 거 같은 나의 모습에 돌아보며 아무리 괴로워해도, 오늘 내 삶에서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이상, 나는 더 낮은 자리에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삶 가운데에 나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는 자세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다 보니,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삶을 살면서도,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설교말씀처럼 양심이 무디어져서 느껴지지도 않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들 조차도 둔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온 거 같다.

그래도 최근에는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며 붙잡으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죄라고 했을 때, 어떠한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죄의 형태를 떠나서, 나라는 인간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조금씩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에 내 자신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한번씩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착한 척 하고 살기 힘들다’이다.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서 겉으로는 유한 모습을 보이며 표출을 잘 안하지만, 사실은 그 순간순간에 내 안에도 여러가지 생각들과 감정들이 빠르게 오간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내 안에 있는 여러가지 생각들 속에 무엇인가 꼭 행위로 드러나는게 아니어도, 내 안에는 정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최근에 계속 하게 되는 거 같다.

10절에서 다윗은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하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는 그가 죄를 사함 받은 후에, 그것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소원함이자 결단임을 보게된다. 이 말씀을 통해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셨던 거처럼, 내가 가던 길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켜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결단하고, 나의 육의 생각과 싸워야 하는 것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 두가지를 어떻게 하면 더 쉽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육신의 생각은 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육신의 갈망을 채우는 유혹의 생각이고, 영의 생각은 우리 영의 목마름을 채우는 영감의 생각이라고 정의를 해보았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하나님과 더 관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깨달은 것을 행함으로 까지 연결시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영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을 때 드러나게 되는 행동이 사람의 기준에서는 꼭 선해보이지만은 않는 것일 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믿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가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선택을 하는 것 조차도 사실은 나로서 스스로는 하기 힘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걸었던 사도바울 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말하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을 만큼 나의 의지와 결심만으로는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로마서 8장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결국 우리는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를 간구하며 그 도우심을 구하며 나를 끊임없이 치는 싸움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릇 안에 어떤 것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술잔이 되기도 하고, 물컵이 되기도 하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거 같다. 말씀을 묵상하며 한 예화를 보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추장은 궁금해 하는 손자에게 설명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 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이 예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영과 육의 생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께 나의 생각을 내어 드리는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을 때 이 생각을 붙잡고 싸울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의지하여 영의 생각으로 아예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퇴근후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그것”이라는 설교를 들었는데, 사도바울이 어떻게 목숨까지 걸어가며 복음 전파에 힘썼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께 빚진 자로써 여기고 살면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붙잡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말씀 중에 하나님께 내 삶을 내어 드리는 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오늘 전체적으로 묵상한 영의 생각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어떻게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가?라고 했을 때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사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통해 주신 복음 전하는 삶에 대한 소원함이 있다. 이 말씀을 나의 평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었는데, 돌이켜보면 오늘 나의 삶 가운데서 이 복음 전하는 삶이 나의 ‘진짜 목표’가 되어서 살지 못하고 있던 순간들이 너무 많았던 거 같다. 다시 이 말씀을 새롭게 붙잡기로 결단한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사명을 이뤄가기 위해 나를 주장하지 않는 싸움을 통해 영의 생각을 따르기 위해 애쓰고, 그 가운데 정말 내가 죄인됨을 깨닫는 자리까지 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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