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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 새생명묵상(1과 세상의 시작)_김기업

요즘 다시 나에게 주권의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아니, 알게 모르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 결국 주권과 소유권의 자리싸움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잠시 또 놓치고 날려버리고 있었던 부분이지 아직도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것이 주권의 문제이다. 새생명 1과 세상의 시작에서는 질서를 세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룬다. 하나님이 태초에 이 땅에 완벽한 질서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질서를 여전히 유지, 보수, 경영, 진행하고 계시고 이것이 바로 분명한 목적이 있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서를 깨뜨리는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반역하게 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죄에 빠뜨린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원함과 목표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즉,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나에게는 "주권 = 질서"라는 수식어로 와닿았다.

하나님은 시공간, 물질, 인간의 모든 질서를 세우셨다. 그러면 그 질서를 태초 이후 인간에게 맡기셨는가? 나는 자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씀에는 인간에게 그 질서를 맡겼다는 내용은 없었다. 다만 하나님이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 보수, 경영 진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질서를 맡기지 않으신 것처럼 주권 또한 나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다. 새생명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표현되어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을 훈련의 시간으로 삼고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하늘의 전쟁 이후 사단을 땅으로 쫓으신 이유도,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이유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이유도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질서 속에서 사는 훈련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훈련은 언제 끝이 나는가? 내가 다 했다하고 끝낼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훈련의 끝은 하나님이 끝내실 때까지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훈련받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2~19 말씀에 부활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19절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가장 불쌍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믿음도 있고 소원함도 있지만 부활생명이 없다면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은 그저 이 세상의 삶뿐이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이 아닌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 말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신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 내 삶을 드려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내 삶에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순종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그 순종을 드릴 때 그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만날 수 있다.

조회수 3회댓글 2개

2 comentarii


Membru necunoscut
26 mar. 2019

김기업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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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bru necunoscut
26 mar. 2019

김승호

요약한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이고 그 훈련은 오늘 내 눈앞에 놓인 작은 순종부터 시작되며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더 경험할 수 있다. 경험하고 싶다.

라는 내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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