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일) 고난주간과 부활절
일주일의 고난주간 말씀을 지나 부활절로 왔다. 늘 하던 사순절 아침금식으로 시작된 이번 사순절은 민우형의 간증처럼 마음을 구별하여 드리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고난주간의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려서 괴로웠는데, 부활절 예배를 통해 모든 죄에 대해 승리하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하나님께서 찔러주신 것은 두 가지였다. 고린도후서 말씀으로는 고린도 교회에 와 있는 거짓교사가 곧 나의 모습임을 보여주셨다. 바울의 책망을 듣고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울의 음성으로 바꾸고, 바울이라는 한 개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편지의 내용을 무효로 만들려 했던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거짓 교사, 즉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이었다.
십자가캠프 전에, 교만하고 붕 뜬 마음에 대해 책망을 들었는데 그것이 듣고 싶지 않아 감정이 올라오고, 감정이 나의 주인이 되자 모든 훈계를 거부하며 훈계를 한 사람을 내 속에서 깎아내리는 마음이 있었다. 내 문제에 대해 정답을 이야기 해 줘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 짜증을 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이 고린도교회의 거짓교사들과 동일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에 대해 기도했을 때에는 '충성' 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충성도 내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선을 원할지 모르나, 행할 능력이나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존재이다. 오직 성령으로만 생명의 면류관에 이르는 '죽도록 충성하라'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령은 회개로서만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두 번째는 예배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삶의 형태로는 어부를 때려치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여타의 제자들은, 스스로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향유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을 보며 비난하고, 겟세마네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으나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고된 대로 십자가를 향해,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고 있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를 쫓아 다녔음에도 말이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뿔뿔이 흩어지고, 낙심한다. 예수님이 자신이 죽을 것과 부활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적어도 세 번은 말씀하셨는데도 말이다.
더빛학교의 교사가 된 지 4년차에 접어드는 2018년이다. 올해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대한 말씀을 뽑은 것으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주일예배에서도, 학교 입학식에서도, 더라이트 워십을 통해서도, 십자가 캠프를 통해서도 말이다. 이번 고난주간 말씀을 통해서는 제자들의 자리에서 여인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 늘 공허한 내 마음과 양심을 보며 화만 내고 있었다.
'내가 진정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은 자'라는 결론과 거기서 나를 건지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매일을 살기까지는 여전히 오래 걸릴 것만 같다. 구원에 대한 감격으로만 살기엔 나의 자기의와 교만함과 딱딱한 마음이 좀처럼 쉽게 깨어질 것 같지 않다. 쉽게 가고 싶고, 갈 수 있다는 마음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이 생각은 내가 쉽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곧 '할 수 있다'라는 교만한 생각을 사탄이 심어준 결과인 것 같다.
그 마음에 대해 하나님이 주일예배를 통해 답을 주셨던 것은, 정해 주신 범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생각'부터 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 번에 인생이, 인격이, 습관이 바뀌기란 어려운 일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행동을 붙잡고 싸워 보는 것 밖에 없었다. 그 마땅히 해야 할 생각의 범위는 무엇일까에 대해 또 묻게 되었다.
그러다 목요일에는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아이들의 예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더 라이트 워십 시간에 세 명의 아이들이 맨 뒤에 서 있었고, 그 중에 한 명은 목사님의 말씀에도 내려가지 않고 맨 뒤에 남아있었다고 하셨다. 성 금요일 금요기도회 때 찬양을 하면서 보니 정말 심각한 상황임을 느꼈다.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한 사람들이 예배를 경히 여기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아이들의 상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에 있다 보니, 나는 그럼 예배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졸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뒤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 나의 모습이었고, 졸음을 참기에 급급한 것이 나의 영적 상태였다.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완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를 잡아 본 사람만이 이가 이인줄 아는 것 처럼, 나의 죄와 끝까지 싸우지 않았기에 아이들을 도울 수가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행동을 바꾸는 것도 정말 이 잡듯이 싸우는 매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인데. 내가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
오늘 간증을 한 새가족의 간증도 정말 도전이 많이 되었다. 나는 원래 마음이 부유하여 새신자때에도 저런 고백을 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 은혜 받고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며 살고있는 지금에도 내 마음이 저렇게 말씀을 향하여 목마른가? 라고 스스로 질문해 보니 부끄러웠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날 아침, 무덤으로 달려갔던 마리아는 유월절과 안식일을 지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에 무덤에 갔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천사에게 들을 수 있었다. 예수님에게 가장 관심이 있었던 여인들 처럼, 이제는 내 온 마음을 드려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를 기대하는 자리에 먼저 마음을 드려 나아가야겠다. 나의 목마름은 오직 예배(말씀과 성령)를 통해 채워질 수 있음을 믿으며, 매 주일의 예배가 곧 내 삶의 목적이 되길 원한다.
이사야 55:1-2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딤후 2: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꼐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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