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15 새벽예배
고후 8:1~15
오늘 말씀을 보면서는 물질이나 연보보다는 은혜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에 한 가지 질문이 든 것이 있다. 내가 은혜를 많이 받고 있고 마음에 여유가 넉넉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 뭐,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하루 걸러 하루 다른 나의 마음을 보면서 답답했다. 꾸준히 상태가 좋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 있지만 내 상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섬길 수는 없을까?
오늘 말씀에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는 마게도냐 교회에 대해서 나온다. 그들은 바울이 권면하기도 전에 이미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바울에게 간절히 구하며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자원하였다.
물질을 드리는 것, 은혜를 나눌 때 그 물질과 은혜가 더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은혜를 나눌 때 오히려 그 은혜가 더 풍성해진다. 그 은혜가 흘러넘쳐서 다른 영혼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아서 도대체 어떠한 삶을 살기 원하는가? 나만 좋고 나만 잘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가? 어찌보면 내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너무나 작아서 갖고만 있으면 더 이상 받을 수도 없고 그 안에서 고여 썩게 된다.
반대로 은혜를 나누는 것은 나의 믿음, 나의 중심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거닐다가 오랜만에 선악과를 보면서 '아, 하나님이 저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셨지. 맞아, 그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야'하며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게 되는 것처럼 나의 물질, 나의 은혜를 나누는 것은 반대로 '이 물질이 정말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은혜임을 기억합니다.'하며 오히려 나의 중심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순종을 마음으로 주실 때 즉각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막상 그런 마음이 들 때 즉각 순종하려고 해보면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기도하며 받은 마음은 너무 큰데 교회를 나와 세상 밖에 나가는 순간 현실적인 생각과 계산들이 마구 돌아간다. 그리고는 결국 순종하지 못할 때가 참 많다.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왜 나는 내 상태에 따라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고 즉각 순종하기가 어려울까?' 오늘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바울의 평가를 보면서 그 답을 조금 찾은 것 같다. 5절에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먼저 인생의 주권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다.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린 이 헌신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결국 다른 형제들을 진정으로 돕는 헌신을 낳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삶의 모든 것으로 삼았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모든 것으로 여겼다.
'왜 나는 내 상태에 따라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고 즉각 순종하기가 어려울까?' 이 질문이 내 속에서 올라올 때마다 오히려 나의 주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나의 주권이 나에게 있는가? 주님께 있는가? 내 삶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인가? 예수님인가? 결국 결론은 주권의 문제이다. 여전히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나는 언제든지 인색해지고 손에 쥔 것을 움켜지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인색함을 버리고 움켜쥔 손을 펴게 한다. 정말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한다.
하나님은 그 움켜쥔 손을 펴시고 더 많은 것을 부어주셔서 흘러 넘치게 하시기 원한다. 나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곧 나의 그릇을 넓히는 작업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으셔도 내 그릇이 작아 더 줄 수가 없다. 나의 것을 비우고 주님께 나의 그릇을 맡길 때 주님의 것으로 온전히 넘치게 채워주신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그릇이 작든 크든 그 부어주신 만큼의 은혜를 또 흘려보내고 또 새롭게 하나님의 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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