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16 이분법적인 세상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_김승호
- 2018년 1월 16일
- 3분 분량
2018. 1. 16(화) 이분법적인 세상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사탄은 참 영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우리에게 정해준다. 그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마치 자유인 것 처럼. 이 아젠다세팅을 당해버리면 거기서 나오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고린도교회가, 현대 사회가 그 아젠다 안에 같혀있다.
현대사회에서는 YOLO라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쾌락주의가 훨씬 힘을 받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 반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는 신앙의 삶이 금욕주의 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그런 신앙인들에게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답답함 섞인 조롱이 오기도 한다.
바울은 이 사단의 아젠다세팅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관점 우리에게 제시한다. (사실은 원래 이것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사단이 우리의 생각을 박스 안에 잘 가둔 것이었겠지만) 결국 십자가이다. 자신의 몸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사는 삶.
그렇다면 결혼 해서야 비로소 서로를 위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다. 미혼인 자에게도 나를 포기하는 삶, 곧 십자가 지는 삶, 복음 전하는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요구된다. 바울처럼 평생을 미혼으로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지만... 그건 정말 은사인 것 같다. 그러한 삶을 사는데 정욕은 상당히 방해가 된다. 정욕이 불같이 타서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것이 실제 무엇인지 바울처럼 발견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려면 현실의 나를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외치는 구호와 내가 분리되어 버릴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 이전의 삶과 결혼 이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내 뜻대로 사는 삶을 포기해야 그 이전과 이후가 모두 의미를 갖는다. 총각에게도, 처녀에게도, 결혼한 부부에게도, 홀아비에게도, 과부에게도,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를 둔 자에게도 십자가의 미련한 도를 따르는 것만이 축복이며,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요구된다.
오늘 두신 자리가 곧 하나님과의 결혼생활이 될 수 있다. 어짜피 성령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사람과도 완전히 연합할 수 없다. 사탄이 준 생각의 틀에서 날 꺼내셔서 미련한 삶을 사모하게 하신 주일예배의 말씀을 붙잡고 기억하며 나는 죽고 예수가 드러나는 오늘을 살고 싶다. 2018. 1. 16(화) 이분법적인 세상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사탄은 참 영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우리에게 정해준다. 그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마치 자유인 것 처럼. 이 아젠다세팅을 당해버리면 거기서 나오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고린도교회가, 현대 사회가 그 아젠다 안에 같혀있다.
현대사회에서는 YOLO라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쾌락주의가 훨씬 힘을 받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 반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는 신앙의 삶이 금욕주의 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그런 신앙인들에게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답답함 섞인 조롱이 오기도 한다.
바울은 이 사단의 아젠다세팅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관점 우리에게 제시한다. (사실은 원래 이것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사단이 우리의 생각을 박스 안에 잘 가둔 것이었겠지만) 결국 십자가이다. 자신의 몸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사는 삶.
그렇다면 결혼 해서야 비로소 서로를 위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다. 미혼인 자에게도 나를 포기하는 삶, 곧 십자가 지는 삶, 복음 전하는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요구된다. 바울처럼 평생을 미혼으로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지만... 그건 정말 은사인 것 같다. 그러한 삶을 사는데 정욕은 상당히 방해가 된다. 정욕이 불같이 타서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것이 실제 무엇인지 바울처럼 발견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려면 현실의 나를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외치는 구호와 내가 분리되어 버릴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 이전의 삶과 결혼 이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내 뜻대로 사는 삶을 포기해야 그 이전과 이후가 모두 의미를 갖는다. 총각에게도, 처녀에게도, 결혼한 부부에게도, 홀아비에게도, 과부에게도,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를 둔 자에게도 십자가의 미련한 도를 따르는 것만이 축복이며,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요구된다.
오늘 두신 자리가 곧 하나님과의 결혼생활이 될 수 있다. 어짜피 성령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사람과도 완전히 연합할 수 없다. 사탄이 준 생각의 틀에서 날 꺼내셔서 미련한 삶을 사모하게 하신 주일예배의 말씀을 붙잡고 기억하며 나는 죽고 예수가 드러나는 오늘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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