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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06 QT묵상 (히 11장)_김승호

17.07.06(목) 큐티 후 묵상

히브리서 11장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By faith Noah, when warned about things not yet seen, in holy fear built an ark to save his family. By his faith he condemned the world and became heir of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by faith.

오늘은 큐티 시간에 나누지를 못했다. 새벽말씀도 듣고 새벽기도를 했지만 말씀 속에서 붙잡아 지는게 잘 없었다. 그래서 나가서 기도를 조금 하다가 또 졸아버렸다. 이게 제일 괴롭다. 언제쯤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왜 기도를 못할까. 마음이 가난하지 않아서이다. 왜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가? .... 여기서부터는 잘 모르겠다. 꿈이 없기 때문인가?

오늘 큐티를 하면서는 당대에 의인이라 불리었던 노아의 삶의 자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는다.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노아는 경외함(Holy fear)으로 방주를 준비한다.

어떻게 120년이나 한결같이 방주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 그 조롱받는, 유난스러운, 지리한 싸움을 어떻게 끝까지 할 수 있었을까? 노아에게 있어 하루하루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동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영의 생각은 120년간 방주를 짓는 것을 가능케 한다. 구원의 통로를 예비하게 한다. 반면 육의 생각은 땅에 있는 모든 혈육있는 자의 생각이다. 구제의 행동과 여러 인간적인 사랑도 세상에 가끔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에 속한 모든 자들의 행위를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 라고 일축하신다.

120년의 차분한 주님과의 동행을 방해하는 나의 육의 생각이 무엇인가. 모든 생각들이다.(이렇게 퉁칠 수는 없고, 하나씩 구체적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냥 내 안에는 육의 생각밖에 없다. 오직 말씀과 연결되어 반응할 때에만 영의 생각으로 비롯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큐티가 끝나고서 글로 정리하면서야 말씀을 조금 붙잡는다. 보이지 않는 경고를 믿음으로 보리라. 거룩한 경외함, 곧 두렵고 떨림으로 깨어서 오늘 하루의 순종을 하고 싶다. 내가 120년을 순종할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무의미한 고민은 이제 내려놓고(이건 결국 나를 순종하지 못하게 한다), 사단이 주는 생각과 치열하게 싸워야겠다. 음란, 교만, 시기, 열등감, 게으름, 안일함...같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에 있는 벽들을 제거해서 방주 짓는 일상을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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