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에서부터 이삭의 생애가 아주 짧게 언급된다. 물론 그 전에 아브라함의 생애와 이삭의 생애는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종 엘리에셀과 함께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구하는 과정 속에서 잠깐잠깐 이삭이 언급된다.
창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창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러나 정작 이 사건들 속에서 이삭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 자신이 제물로 바쳐치는 상황, 아버지의 뜻에 의해 자신의 아내가 결정되어지는 상황.. 우리 생각으로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다른 그 누구보다 '이삭' 이 너무 중요하게 다루어 질 수 밖에 없는 사건들인데, 정작 성경에서는 이 사건들 속에서 이삭이 겪었을 심리적 어떠함, 그가 느꼈을 감정이나 생각에 집중하며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매우 담담한 어조로 이삭이 그저 '순종' 했다는 사실 하나만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매우 당황스럽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묵상하며 이삭이 그 상황에서 어떠했을까라는 상상을 펼치고, 또 나라면 어땠을까 라는 대입을 해보며 이 말씀을 대하게 된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의 표현과 내면의 감정, 느낌을 가장 최상위의 가치로 올려놓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사는 자아가 가장 세련되다고 여기며 사는 시대다. 이런 시대적 풍조 속에서 우리는 성경에서와 같이 이삭의 의중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어쩌면 '이삭의 인권' 에 대해 논하며, 우리의 인본주의적 눈으로 아브라함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비난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도 다 이런 세상의 풍조와 영향력 아래 교육받고, 세뇌되고, 누리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삭의 생애' 는 참으로 잔잔한듯 하고 평온한 듯 하고 짧게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같은 젊은 세대 크리스찬들에게는 아주 큰 도전이 되고 임팩트를 주는 본문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젊은세대에게 중요한 가치관인 '자아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직업과 미래에 대하여' 말이다.
자아에 대하여
이삭의 인생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그가 아버지와 함께 갔던 모리아산, 번제단에서부터다. 그 때 이삭이 처음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등장하고, 그 대화는 다른 것이 아닌, 아버지께 번제에 쓰일 어린양이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즉, 이삭의 삶이 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번제'와 관련되어 자신이 그 제단에 바쳐질 '제물'로 부르심을 받을 때였다. 자신의 두 손과 온 몸이 결박된 채, 오직 죽어야만 내려올 수 있는 번제단에 올라가, 아버지가 내리치는 칼 앞에 아무 저항도 없이 잠잠히 누워있던 이삭.. 그것이 이삭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출발이었다.
오늘 우리는 '자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대적 자아의 개념은 내 안에 있는 감정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나의 진정성을 찾는 자아라고 한다. 한마디로, 감정이 너무 중요해서 그 감정대로 행동하고 실현함으로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감정' 에 마치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부여해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자아' 는 '현대적 자아' 와 충돌한다. 이삭은 자신의 감정에 근거하여 행동하지 않았고, 감정보다 아버지의 뜻, 권위에 더 복종하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그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결박시켰다. 이삭이 누운 번제단은 '자아의 죽음' 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나의 뜻, 감정, 생각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주권을 아버지 손에, 하나님 손에 내어맡긴 자리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번제단 위에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옛 자아를 철저히 죽임으로서 예수 안에서 새 자아를 입어야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모든 주권을 포기하고 번제단 위에 올라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결박하고 순종하는 자아가 진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경적 자아다. 이제는 '자아' 에 대하여 결론내자. 더 이상 '옛 자아에 속한 것들' 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완고한 자리에 있지 말자.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결혼에 대하여
이삭의 결혼은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얼굴도 보지 않고 어떻게 결혼을!?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결혼을!? 이건 내 인생이고, 내 결혼인데!? 우리 시대에서 결혼을 생각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과 가치관은 철저히 나의 감정과 나의 행복이다.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 을 고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 들린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사람.. 결혼문제만큼은 하나님께 온전히 주권을 돌리기 힘들다. 그만큼 '결혼' 안에는 여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래서 또 그만큼 집착하고, 그만큼 우리의 원함과 기준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이삭은 외모도 보지 않았고, 자기 기준으로 찾지도 않았고, 특별한 원함을 보이지도 않았다.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아내를 찾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요소가 되지 않았고, 철저히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이 세운 기준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동안 이삭은 자기 집에 머물며 엘리에셀이 데려올 신부감을 기다렸고, 그 신부를 보고 사랑하였다고 성경은 아주 짧게 이삭의 인내와 믿음의 반응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삭의 결혼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 봐야 한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이, 사실상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비본질적인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기준과 가치관, 감정적 요소들이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을 결정함에 있어 너무 큰 요소로 여겨지지만, 그래서 많은 크리스찬들 조차도도 '그래 사람은 다 어쩔수 없지 뭐' 하며 그 기준 안에서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삭의 결혼을 통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우리가 이루거 가야 할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으시다.
그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가 결혼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내 감정? 내 원함? 나의 만족과 행복?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본질을 붙잡고 본질을 놓치게 만드는 사단의 속임수다. 우리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바로 '하나님 나라' 다. 곧 '결혼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세워가기 위해 주신 제도요, 배우자는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도록 주신 돕는배필' 이라는 사실이다. 이 본질을 붙잡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나머지 비본질적인 것들도 우리에게 반드시 채우실 것이다! 그것이 이삭의 결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결혼문제 있어서도, 우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자.
먼저 그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기준으로 구하고 나를 헌신하는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가정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직장과 사명에 대하여
나는 우리의 직장과 사명에 대한 것도 이삭의 생애를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삭은 자신의 생애에서 무언가 새롭고 특별한 것을 이루려고 한 것 같지 않다. 특별히 아버지가 거주하던 곳(브엘세바)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려 한 것도 아니었고.. 그의 삶은 많은 부분 아브라함의 생애와 닮아 있다. (실패마저도..) 성경은 일부러 이삭의 삶이 아브라함과 독립되어진 특별한 새로운 삶의 출발이 아닌, 아브라함의 삶의 연장선에 있음을,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안에서 이삭의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창26: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아브라함이 소유하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 일곱개의 우물들이 모두 메워졌다. 이삭은 다시 이 우물들 곁에 머물며, 메워진 우물을 다시 팠다. 그리고 그 우물들에게 아버지가 부르던 동일한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삭의 삶이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아버지가 믿음으로 값을 주고 지불하여 소유한 우물을 다시 되찾아옴으로서 자신도 이 믿음의 값을 지불하여 이 믿음의 걸음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심지어 동일한 이름까지 붙인 것은 아버지의 믿음을 기억하기 위함이며, 이 우물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이 아브라함 때의 값을 주고 소유한 일곱 개의 우물들이 오늘 우리 교회에게 주신 비전들과 사역들로 느껴졌다. 심목사님을 통해, 박목사님을 또 앞선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시작된 여러가지 교회사역들이, 그리고 아직 펼쳐지지 않은 사역들까지도 모두 우리에게 주신 우물들이며 우리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기 보다도 이미 주신 우물들 안에서 그것이 메워졌다면 다시 파내고, 빼앗겼다면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파서라도 샘의 근원이 터져나오게 하는 그것이 우리 다음세대가 가져야 할 비전이요, 직업이요, 사명이요,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비전의 우물들이 있는가. 그 중 아무것이나 믿음으로 붙잡고 뛰어들어 수고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그 우물에서 생수의 물이 터져나오게 하실 것이며, 그 생수를 통해 나와 우리 교회 뿐 아니라 온 열방에까지 생수의 강으로 축복하실 것이다!!
직업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 사명에 대한 걱정?
나 혼자 머리 싸맨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을 잘 이해하고, 시대를 읽는다고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비전 안에서, 그 비전을 붙잡고 파놓은 우물들 안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그것이 진짜 비전을 찾는 길이요, 사명을 찾는 길이다! 샘의 근원이 터져나오기까지.. 생명수가 흘러나와 온 땅을 적시기까지.. 여호와께서 주시는 백배의 복을 얻기까지.. 우리의 믿음의 수고를 드려보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창26:24-25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나는 이것이 이삭에게 참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떻게 아버지의 삶을 신실하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셨는가를 너무 잘 알기에, 비록 아직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은 크지 않을지라도, 아버지의 하나님만큼은 확실히 보고 믿었기에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 말씀하신 것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였듯, 나도 너와 함꼐 하리라' 는 약속으로 붙잡아 져서 마음에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 역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안에 속하여있음을 알고 감격하며 주님께 예배하였을 것이다.
오늘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힘이 없다. 그러나 더빛교회를 세우시고, 더빛교회의 주인되시며, 더빛교회 안에서, 더빛교회를 통해 일하시고 함께하시며 인도해오신 하나님은 너무 분명하다. 그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시며, 교회를 위하여 그 약속이 있는 자리에, 비전의 우물이 있는 자리에 내가 믿음으로 서 있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시며 나에게 복을 주어 복의 근원으로 쓰실 것이다. 우물에서 터져나오는 생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자! 그리고 주어진 우물을 파자!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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