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 에스겔 35장 1-15절
- 박정배

- 8월 4일
- 5분 분량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본문: 에스겔 35장 1절 ~ 15절
여는 말
어제 34장에서 하나님은 친히 목자가 되어 흩어진 양 떼를 찾으시고 평강의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갑자기 회복의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심판 신탁으로 돌아갑니다. 그것도 이미 25장에서 심판을 선고받았던 에돔, 세일산을 향해서입니다.
왜 회복의 복음 한가운데에 에돔 심판이 끼어 있습니까. 포로들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미워하는 원수가 저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과연 평안이 찾아올 수 있는가?'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회복을 위해서는 형제의 재앙을 삼킨 세력의 청산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심판 선언의 한복판에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한 문장이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10절). 폐허에도 계신 하나님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 형제의 재앙을 이용하는 자를 하나님이 친히 대적하십니다 (1~9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피를 만나게 한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네가 피를 미워하지 아니하였은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35:6)
본문은 이유 설명도 없이 도전 공식으로 돌연히 열립니다. "세일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3절). 히브리어 '힌니 엘레이카'는 하나님이 바로 지금 당신의 전 존재를 걸고 행동에 나서겠다는 강력한 임재의 선언입니다. 에돔이 누구입니까. 에서의 후손, 이스라엘과 피를 나눈 형제 민족입니다. 그런데 5절이 그들의 죄를 기소합니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 '옛날부터 품은 한', 곧 '에바트 올람'은 직역하면 "영원의 원한"입니다.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야곱과 에서의 갈등이 수백 년 동안 응축되어 온 구조적 적대감입니다. 개인적 화해(창 33장)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원한을 세습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한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불태우던 날, 유다가 가장 약해진 바로 그 순간에 폭발했습니다.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시 137:7) 외치며 박수를 쳤고,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형제들을 색출해 칼에 넘겼습니다(옵 10~14).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선고에는 '피'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됩니다. "피를 만나게 한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에돔은 히브리어로 '붉음'입니다.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에서처럼(창 25:30), 형제의 붉은 피를 탐하다가 결국 피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게 된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듯이(창 4:10), 형제가 흘린 피는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의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여기서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에돔의 죄는 전쟁을 일으킨 죄가 아니라 형제의 재앙을 기회로 삼은 죄였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치명적 환난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것 — 하나님은 이것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시고, 친히 보수자가 되어 억울한 피를 갚아 주십니다. 남의 무너짐이 나의 기회로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에돔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2. 폐허에도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10~13절)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35:10)
에돔의 두 번째 죄는 영토에 대한 야욕입니다.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다 멸망했으니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들의 계산은 고대 근동의 상식이었습니다. 백성이 추방되고 성읍이 폐허가 된 땅은 그 신에게 버림받은 땅이니,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 한 문장으로 그 계산을 뒤엎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성전이 불타고 언약궤가 사라지고 백성이 끌려갔어도, 하나님은 그 땅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신 것(11:23)은 사실이지만 그 땅 자체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이트(Wright)의 표현이 생생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땅 위에 "무단 침입자는 고발함"이라는 커다란 팻말을 내거신 것입니다. 그 땅은 여호와의 것이고(레 25:23), 이스라엘은 잠시 퇴거당한 세입자일 뿐이며, 소유주의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야웨 샴'(여호와께서 거기)이라는 히브리어가 에스겔서의 마지막 구절, "여호와 삼마 —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48:35)와 호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의 한복판에서 이미 회복의 결론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12~13절은 하나님이 이 문제를 왜 이토록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시는지 보여 줍니다. "저 산들이 황폐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넘겨주어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12절). 에돔은 망해 가는 이웃 나라를 조롱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땅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원수들의 호언장담을 엿들으시는 습관이 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지금 내 삶의 어떤 자리가 폐허처럼 보입니까. 무너진 가정, 실패한 사역, 잿더미가 된 계획 앞에서 '하나님도 이곳을 떠나셨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까. 겉모습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판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에돔의 죄였습니다. 폐허 같은 자리에도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조롱과 큰소리를 하나님이 다 들고 계십니다. "내가 들었노라!!"
3. 남의 황폐를 기뻐한 그 기쁨이 그대로 돌아옵니다 (14~15절)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15)
15절의 판결문을 보십시오.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에돔이 형제의 황폐함을 보고 기뻐한 그 기쁨의 크기가 그대로 심판의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거울과 같습니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15). 여기서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외적 행위만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까지 정확히 측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돔은 칼을 든 죄로만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한' 죄로 심판받습니다. 잠언은 이미 경고했습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잠 24:17~18). 원수의 몰락 앞에서조차 기뻐하지 말라 하셨는데, 하물며 형제의 몰락 앞에서겠습니까.
오늘 묵상 에세이가 소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촉망받던 우주비행사가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삼각관계의 상대를 공격했다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초대 교부들이 영성을 위해 경계한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에 시기와 분노가 포함된 이유입니다. 시기는 사라지지 않고 자라서 분노가 되고, 분노는 마음의 폐렴과 같아서 악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고통이나 실패 앞에서 은밀한 안도감, 미묘한 우월감을 느낀 적이 없습니까. 경쟁자가 무너질 때 '잘됐다' 하는 마음이 스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안에도 에돔이 삽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 5:8, 10), 에돔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지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엡 2:16). 형제의 피를 즐긴 자들을 위해 자기 피를 쏟으신 분 — 그 십자가만이 우리 속의 오랜 원한, '에바트 올람'을 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형제의 무너짐을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자리입니다.
맺는 말
형제의 재앙을 기회로 삼은 에돔을 하나님은 친히 대적하셨고, 폐허가 된 땅에도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으며, 남의 황폐를 즐긴 기쁨은 정확히 같은 분량의 황폐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어려움 앞에서 내 마음의 반응을 살피고, 은밀한 기쁨 대신 함께 우는 긍휼을 택하며, 폐허처럼 느껴지는 내 삶의 자리에서도 '여호와 삼마'의 약속을 붙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찬양 (추천 2~3곡)
새찬송가 426장 〈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 — 오늘의 찬송.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 질투와 미움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본문의 적용 그대로입니다.
새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 시기와 분노라는 마음의 죄를 다루는 본문 앞에서, 은밀한 내면까지 정결케 하시기를 구하는 성결의 찬송입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 내 안의 에돔을 제하고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가득하게 하소서!
오늘의 개인 적용 질문
누군가의 고통이나 실패 앞에서 은밀한 기쁨이나 안도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내 안에서 아직 자라고 있는 '오래된 원한'(에바트 올람)은 누구를 향한 것이며, 오늘 그것을 십자가 앞에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지금 내 삶에서 폐허처럼 느껴지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곳에도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35:10)는 약속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겉모습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판정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
더빛교회가 다른 지체의 어려움을 판단하거나 거리를 두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형제의 회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성도들 각자의 폐허 같은 자리 — 무너진 가정, 건강, 일터 — 위에 '여호와 삼마'의 임재를 확증해 주시고, 원수처럼 여겨지는 사람을 향한 오랜 원한을 십자가의 은혜로 녹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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