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22~2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후, 예수님은 또 다시 떠나신다. 무리들 속에서 그들의 환대와 인기에 취해 있을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그 다음 행선지로 보내시고, 모여있는 무리들도 각자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홀로 산에 올라가셨다.
만약 나라면, 그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면서 환호하고 기뻐하는 무리들 속에 더 머물렀을 것 같다. 제자들도 그러고 싶지 않았을까. 충분히 더 그 시간을 누리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재촉하여 그 곳을 떠나게 하셨다. 마태는 이 장면을 떠올리며 '즉시' 라는 단어를 통해 그것이 아주 즉각적으로 긴급하게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아마도 예수님은 보시지 않았을까? 축제 같은 그 분위기 속에서, 영적 긴장을 잠시 놓은 그 제자들 마음의 틈새로, 원수들이 뿌리고 간 자기사랑, 세상사랑, 영적허영의 가라지들을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이 제자들 마음 속에 더 자라기 전에, 지체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여 그 자리를 떠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풍랑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ㅎㅎ 확실한 가라지 제거 방법이 아닐까 싶다 ㅎㅎ)
이렇게 제자들도, 무리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산에 오르신 예수님.
그 분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아버지께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사실, 앞서 보았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께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모여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육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
둘째는, 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인 이 떡이, 앞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나누어줄 자신의 찢겨진 몸을 상징한다는 것. (예수님은 이 두번째를 더 크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이 기적의 현장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 뿐이었다. 예수님은 그 마음 속에서 한 순간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잊으신 적이 없다. 모두가 떡을 떼며, 기뻐하며, 환호하는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이것은 잠시 맛 본 천국잔치의 모형일 뿐이요, 진정한 천국의 기쁨과 축제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그것은 오직 예수께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자신의 몸이 찢겨야 주어지는 것임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다시 그 목적지를 향하여..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자신의 발걸음을 떼고 계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의 기도. 그것은 아마도 십자가의 길을 다시 가시기 위한 기도였으리라.
육신의 연약함에 지지 않도록, 다가올 수많은 박해와 고난, 제자들의 배신 앞에 실족하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아버지와의 깊은 연합으로 들어가는 충전과 회복의 시간이었으리라.
앞으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갈 제자들. 그러나 여전히 작은 풍랑 하나에도,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앞에 계셔도 의심하며 실족하여 바다에 빠지고 마는 제자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책망하시지만, 그 즉시 손을 잡아주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는 예수님.. 어서 믿음이 자라서 자신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 원하시는 주님의 애정어린 시선과 마음이, 그리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십자가를 향하 홀로 묵묵히 가고 계시는 예수님의 외로움이 함께 전해지는 오늘 본문인 것 같다. 사순절이라서 더 그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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