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묵상Day3]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기까지..
- 이정현
- 2021년 4월 1일
- 3분 분량
매주 수요일은 오늘밀에서 일하고 계시는 집사님들과 함께 온라인으로 큐티를 하는 날입니다. 이제 막 큐티를 마치고,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아서 고난주간 3일째 묵상글은 이것으로 대신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베드로의 이야기가 큐티 중에 언급되면서, 나도 내 이야기를 좀 하게 되었다.
에니어그램 8번으로서 베드로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나.
'소원한다, 원한다, 할 것이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이런 말들을 은연중에 나도 참 많이 하는 것 같다.
베드로가 "주를 위해 죽겠나이다!" , "남들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절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과감하게 고백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그런 고백들을 남들보다 쉽게, 많이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남들은 부르기 주저하는 무게감 있는 찬양들도 나는 '하면 되지. 하면서 내 고백으로 드리면 되지. 주님께서 소원을 주셨잖아' 라고 생각하며 안하기보다는 주로 부르는 것으로 선택하곤 한다. 예를 들자면.. '십자가의 전달자' 와 같은 찬양.. ㅎㅎ 가사만 읽어도 아 함부로 부르면 안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지금은 그래서 잘 부르지 않는다)
그냥 그 가사의 고백들이 멋있게 느껴지고, 나도 그 고백을 하고 싶다는 이유가.. 그 가사의 내용이 실제로 오늘 나에게 얼마나 적용되었느냐, 나의 내면에 소화되었는가 보다 더 큰 동기와 이유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내 안에 '거짓된 자아, 허상' 을만들게 되고, 나는 마치 그것이 실제의 나인 듯 착각하며 그 자아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는 정말 그랬다.
문제는 무엇인가? 내 안에 형성된 이 거짓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가로막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것과 실제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내가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과 실제 나의 삶과 인격에 드러나는 행동과 선택들은 얼마나 다른지.. 내 안에 이 괴리와 모순을 깨달아야 비로소 자기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며 가슴을 치는 회개가 시작될텐데.. 바로 그 현실을, 나의 실체를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 거짓자아인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내 안에서 진정한 회개가 시작될까?
어떻게 이 거짓자아를 깨뜨리고 주님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까?
눅22:60~62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 모두 베드로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한 가지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누가는 베드로의 실패장면에서, 주님께서도 그 베드로를 보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표현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베드로의 인생에서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모든 연약함이 다 드러난 그 순간을 예수님이 아주 가까이서 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베드로도 그 순간 예수님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눈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고, 그는 곧이어 나가서 울며 통곡했다.
우리는 나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순간, 나의 실패가 드러나는 순간, 나의 죄가 발각되는 순간.. 가장 피하고 싶은 바로 그 순간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순간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도망치지 말고, 그 때 나를 보고 계시는 주님의 눈에 나의 눈을 맞추어야 한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정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에게 이 순간은 얼마나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을까.
그러나 마태,마가,누가,요한은 모두 베드로의 이 실패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적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베드로의 실패를 정죄하거나 모욕을 주기 위함이 아니요, 바로 이 순간이 베드로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직면하고 거짓자아가 부서지는.. 은혜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와 같이 입술의 고백이 행동보다 앞서고, 자신의 모순됨과 비참한 현실을 좀처럼 인식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런 기회들을 주시는 분이다. 제 아무리 멋지게 고백해도, 그 고백대로 단 하루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삶의 구체적인 순간들 속에서 알려주고 계신다. 우리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주님과 눈이 마주치기까지.. 그것이 바로 나를 직면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우리는 그 주님의 눈이 마치 정죄의 눈이요, 심판의 눈인 줄 알고 무서워 피하기 바쁘다.
그러나 막상 그 눈을 마주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나의 오해요, 사단이 주는 거짓 두려움이었음을 알게된다. 왜냐하면, 그 때 만나는 예수님의 눈은 그런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눈은 나의 굳어있고 방어적인 마음의 빗장을 풀어헤치고 나로 하여금 통곡하게 하고, 겸손히 엎드려 죄에 대해 애통하게 만드는 사랑과 용서의 눈이다.
행위의 더러운 것으로 거짓된 자아, 거짓신앙을 만들어 올바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거짓 자아의 감옥에서 구원하여 주세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님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지독한 분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서 주인님의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돈이 여기 있습니다.' 하였다. 그때 주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았느냐?(마 25:24-26)
나의 동기에 취해 스스로 높이고 허상을 만드는 자리에서는 자비로운 주인을 자기 멋대로 오해하고 두려워하는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거짓된 나를 붙잡고 예수님을 오해하는 자리가 아닌, 진짜 예수님과 눈을 맞추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