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난주간은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를 위해 죽을지언정 절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
그의 입술의 고백은 채 하루도 가지 못하고, 모두 다 거짓말이 되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고문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하게 부인했다.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 상관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닭이 울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하염없이 통곡하며 울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2년 여름.
나는 그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이유는 하나.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나의 죄를 다루기 시작하신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꽤나 길었다. 거의 3~4년..? ㅎㅎ..
그 사이 교회는 "안디옥"에서 "더빛"으로 이름을 새롭게 바꾸었고, 교회건물은 수지에서 영덕동으로 새 건물을 짓고 이사왔지만.. 내 안에는 그닥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괴로웠고, 3~4년의 결코 적지 않은 시간동안 나는 우리 주님의 거칠은 (그러나 돌아보면 참 따뜻했던..) 손길 아래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정신을 부여잡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살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자존심으로 버티고, 저항하고, 화내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집착했기 때문에.
왜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도 아주 간단하다.
내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에.
내가 그만큼 자존심으로, 거짓과 위선으로, 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씀 앞에 매우 딱딱했기 때문에.
죄를 죄라해도 마음에 와닿지 않을만큼..
여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 당시 이미 교회에서 너무 많은 칭찬과 인정을 받아버려서 마음이 한 껏 높아진 상태에..
남들 다 어려워 믿음도 잃어버린다는 그 군대에서 홀로 교회를 세우며 말씀까지 전했다는 화려한스펙과..
제대 후 교회에서 간사라는 직분까지 받아, 한동대교회의 리더가 되어 권력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
(물론 과장법이 들어간 표현입니다.. 제가 얼마나 교만했었는지 알리기 위해...)
직분을 받고 한동대교회를 향해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담임목사님께 보낸 문자,
"목사님! 승리하고 오겠습니다! (주먹불끈!)
담임목사님의 대답,
"정현아, 승리가 아니라 동행을 하거라"
이 말의 의미도 깨달을 수 없을만큼, 오히려 목사님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섭섭해만 했던..
이것이 나의 상태였다. 영적인 무지, 근거없는 자신감, 거품만 잔뜩 낀 거짓자아..
그 뿐만이 아니다. 나의 속은 또 어떠했는가. 시커멓게.. 정욕으로 뒤덮혀서 영의 눈이 가리웠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정욕과 음란의 자리에서 건져주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건 은혜였을 뿐 나 자신은 한번도 나의 정욕과 음란을 직면하며 죄와의 싸움을 해 본적이 없었다.
삶의 자리, 환경은 바뀌었으나 내 안에 이글이글하는 정욕은 틈만 나면 나를 삼키려 했었고, 나는 번번히 그 정욕에 끌려다녔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예수님도, 성령님도, 말씀도 아니라 바로 그 정욕이었다. 그러면서도 겉은 바리새인처럼 고상하게, 거룩한 척 하며 남을 가르치고 정죄했다. 입술로는 주님을 잘만 불렀고, 워낙 나의 8번 기질대로 (베드로도 8번일까?) 무엇이든 다 할것처럼,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것처럼 외치기도 참 잘했다.
만약, 주님께서 나를 저렇게 그냥 내버려두셨다면 지금 나는 어떤 자리에 있을까.
오.. 잠깐만 상상해봐도 끔찍하다. 얼마나 모순된 삶을 스스로 살고 있었을까 싶다.
바로 이 때, 우리 주님께서 나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셨다.
그 방법은 나의 죄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빵빵 터뜨리는 것이었다.
정욕의 문제, 음란의 문제, 자존심의 문제, 교만의 문제..
이 모든 것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관계 속에서, 일 속에서 계속 터져나왔다.
이성관계 속에서, 동성관계 속에서, 생활관 안에서, 내가 맡고 있는 대학부 안에서, 사역자들 안에서..
14년부터 맡게 된 교회행정은 성전건축시점과 맞물려서 행정일이 몇 배로 늘어났고.. 나는 수도없이 실수하고, 잘못하고, 깜빡하고, 놓치고.. 그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화내고,, 그런 일들의 연속 또 연속이었다.
내 안에는 내가 그려놓은 거짓자아가 있다.
내가 되고싶고, 그렇다고 믿고 싶은 그런 멋진 자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나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나라고 여기고, 믿고 살고 싶어한다.
내 육신에 거하는 온갖 냄새나고 추잡스러운 죄는 작게 보고, 내 입술의 고백과 내 마음에 소원과 나의 의지를 나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나에게 끊임없이 기대하고 소망을 두는 삶을 살아왔다.
'할 수 있어. 하면 될거야.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도 나를 괜찮게 보고 있는것 같아'
베드로도 그랬을지 모른다. 자신의 멋진 입술의 고백들과, 믿음으로 행하였던 몇 번의 경험들과, 제자들 속에서도 예수님과 더 가까운 듯한 우월감과 자기자랑,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을것 같고 지켜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자기확신과 기대 속에서 살았을 것 같다. 그것이 '나' 라고 믿으며..
성경은 마태,마태,누가,요한 네 복음서에 모두 이 베드로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럴까?그것은 '베드로' 라는 인물과 그의 인생에서 이 실패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와같은 처절한 실패가 훗날 베드로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 가장 기초가 되어주는 필수적인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베드로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정말 맞다. 우리는 주님께 쓰임받기 전에 먼저 철저하게 실패해야 한다.
그 옛자아의 실패가 우리에게 성령님이 임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자아가 살아있으면 예수님도, 성령님도 온전히 알 수 없다.
감사하게, 주님께서 나에게도 실패를 허락해주셨다.
옛 자아로는 절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게 해주셨다.
나에게 성령이 절실히 필요한 자임을 오랜시간을 통해 알게 해주셨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와 같이 정말 그 절망의 순간 예수님과 눈과 눈이 마주치기까지 옛 자아의 실패를 경험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그 은혜를 주님께 구해본다. 자기절망이 은혜의 시작이라는 심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에게는 철저히 절망하고 실망하되, 오직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그 기대로만, 그 소망으로만 살아가는 내가 되길 기도한다.
매일 예수님을 배반하며 살아갑니다. 여전히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외치며 영광을 기대할 순 있지만 십자가의 길은 시작도 못했습니다. 말고의 귀를 자르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해보리라' 식의 자기의 외에는 내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있지 못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며 '그때에는 다 드릴 수 있어, 배반하지 않을거야' 생각하지만 현실 속에서 내리는 작은 선택은 항상 나의 유익과 교만과 정욕을 위해 내립니다. 생각과 고백으로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싶다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거리가 멉니다. 영적으로 잠자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그 모든 수모와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베드로의 영혼의 상태를 보실 때 그럴수밖에 없다는것을 아시고 정죄의 눈이 아닌 사랑으로 바라보아 주십니다. 내 현실을 직면하며 긍휼히 나를 보시는 그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 앞에 마음이 무너질 수 있는 정직한 고난주간 되기를